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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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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자기 – 마이센 이야기>


1. 마이센 자기의 탄생배경


17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아직 유리질화 된 ‘도자기’가 아닌 그냥 도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도자기는 크게 유행이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스스로 도자기를 생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사실은 도자기가 워낙 비싼 값에도 잘팔리기 때문에 권력층은 이걸 만들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1710년부터 현재까지 작센의 드레스덴 근처에 위치한 마이센 공장에서 생산되어 왔다. 독일 지방은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다양한 도요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각자가 나름대로 왕이나 권력자의 비호 아래 좋은 여건에서 제조공장을 운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당시에 중국도자기가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식 자기를 개발하는 일이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하였다.


중국 또는 일본 미술이 유럽의 조형활동에 직접 큰 영향 또는 자극을 준 사례가 두가지 있다. 그 하나는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일본 취향 (자포니즘:Japonisme)으로, 주로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미술에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제트거서를 볼 수 있는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17, 18세기에 유럽을 풍미한 중국취향 (시노와즈리)인데, 일본에 관해서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화사에 의해 17세기 후반 이후 대량으로 수출된 아리타 자기가 18세기 초 마이센 요에서 유럽 최초의 자기 소성 본보기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그때 예를 들면 가키에몽 풍의 호랑이, 봉황, 학, 메추라기, 다름쥐, 모란, 대나무 등의 문양을 넣은 그림이그 후 3세기 가까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분이 고양이과 그리고 일부에는 명칭도 그대로 간직하면서 행해져 왔다는 사실이 있다.


유럽에서 드디어 자기를 최초로 구운 동부동일 드레스덴 부근에 있는 유명한 마이센 요의 자기사를 둘러싸고 도예계에서는 요한.프리드리히.베트거.(J.F.B.ttger 1682~1719)의 이름만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아리타의 채색화도기를 사카이다 가키에몽(1688년 사망)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것과비슷하다.


베트거는 튀링겐의 마을 슈라이츠에서 출납을 보는 서기의 아들로 태어나 약학 연구를 위해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나 츠오른이라는 유명한 약제사 밑에서 공부를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리스칼이라는 약장수를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입수하여 연금술 실험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주인 츠오린은 격노하여 그를 연금술로 고발, 신변의 위험을 느낀 베트거는 1710년 10월 26일에 베를린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했으나 베를린 주제작젠 공사의 통보에 의해 국경에서 체포되어 드레스덴으로 호송되었고, 11월 28일에 근교 모리츠부르크 성에 감금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두번의 탈주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여 생애를 작센 관헌의 감시하에서 보내게 된다.


2. 마이센 자기의 창시자 : 베트거


연금술사였는데 괜히 마이센 국왕에게 잡혀와서는 평생 자기만드느라 고생하다 죽었다. 처음에는 도자기의 비밀이 핵토(카올린’을 몰라서 그렇지 유리지로하 되기는 했는데 빨간색인 “적색자기를 제작하게 된다. 그후 드디어 17010년경, 자기제작에 송강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이도,이  자기는 세련된  맛 등이 덜해서 초반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1702년 초두 작센 선거후 겸 폴란드의 왕인 아우구스투스 강공에 대해 중상주의 입장에서 자기 제조공장 설립을 건의한 치른하우스는 3월 초에 드레스덴 지사인 푸르스텐베르크 공의 저택에서 베트거를접견하고 그를 위해 성 안에 실험실을 만들게 하였다. 1702, 1703년 계속해서 탈주를 시도한 베트거는 치른 하우스의 감독하에 놓여져 1704년부터 두 사람은 공동으로 연구에 들어가 1705년 가을에 베트거는 마이센의 알브레히트부르크성으로,그 후 드레슨덴의 베누스 요세 내의 청장으로 둘러싸인 실험실로 옮겨졌고, 1706년 가을에는 스웨덴 군의 작센 진공에 대비하여 제크지세.슈바이츠(작센.알프스)라는 이름을 가진 드레스덴 동남 산지 마을인 케니히슈타인으로 피난, 그곳에서 만 1년을 보낸다


이 사이에 그는 두번에 걸쳐 자기제조 일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의사표명을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1707년 9월 말에는 다시 베누스요새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해 11월 20일에는 전화로 인해 불황에 빠진 작센국 경제재건을 위해 공업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포고가 강공으로부터 내려와 베트거는 본의 아니게 드디어 자기개발이라는 국가의 지상명령에 구속되게 되었다.


그가 중국의 모델로 모방하여 적색자기, 즉, 석가 소성에 성공한 것은 상기한 포고령과 시기를 같이 한다. 그리고 대망의 자기제조도 그 다음해인 1706년에는 일단 성공을 했다고 생각되지만, 아직 순수한 백토를  얻을 수 없었고 또 유약 개발이 늦었다는 점 등으로 제품에 유리질의 우아함이 결여되었다. 그러나 이 발병을 둘러싸고 관계자에게는 엄중한 함구령이 내려졌으며 직공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킬 것 등의 서약이 강요되었다.

그해 가을인 10월 11일에 치른하우스가 57세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해서 마이센 자기를 둘러싼 한 거성은 사라졌으나 또 하나의 거성이 베트거만이 단독으로 빛을 받게 된다. 스승이 사망한 후 3일이 지나서 베트거는 어떤 서간 속에서 치른 하우스가 만든 하나의 작은자기쟁반의 일을 알게 되고 직공인 자뮤엘.켄페가 그것을 금화와 함께 훔쳐 땅에 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한 일도 있고 해서 치른하우스의장서와 유고는 왕명에 의해 봉해져 관리받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자기가 황금과 동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1709년 3월 28일 베트거는 아우구스트 강공에게 각서를 보내 극상의 광택을 지닌 양질을 백자와 동인도회사가 수입하는 이른바 적색자기에 충분히 필적할 수 있는 아름다운 붉은 용기를 제조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그해 말에는 적색자기 및 백자 제조공장 설립을 신청하였다.그리고 다음해인 1710년 1월 23일에 아우구스투스 강공은 자기공장 건설의 특허장을 수여하고 자기발명 공고를 행하게 된다. 3월 7일 공장용 부지를 마이센의 알브레히트부르크 성으로 결정되었는데 마이센 시가와는 겨우 다리하나를 사이에 둔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베트거는 그 후로도 드레스넨에 남았으며마이센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 시기에 베트거가 가장 부심한것은 양질을 백도토의 입수였는데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1710년 가을분터 작센과 보헤미아의 국경을 잇는 에르츠게이브게산지에서 슈노르 토, 또는 슈네베르크 토라 불리는 일종을 카올린을 얻었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자기의 소성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이 해 5월 라이프치히의 견본시장에는 3,857타렐의 가치를 지닌 베트거의 적색자기 및 백자로 만든 키세르의 기러기 머리와 작은 사발, 작은 접시 등의 견본이 출품되어 적색자기의 반이 1,993타렐에 팔렸다. 자기소성은 실은 연금술의 부산물이며 동시에 결과였던 것이다. 1713년에도 베트거는 강공을 어전에서 동과납에 금은 도금을 입히는 실험을 행하고 있었다.


1715년 강공은 포고를 내려 적자에 허덕이는 마이센 자기공장을 고쳐 세월 것을 명하였는데, 그 후로도 강공의 내탕금 없이는 공장경영은 어려웠다. 납을 금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은 북방전쟁 이래 재정부진에 허덕인 강공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자기제조는 어쨌든 본 궤도에 올랐다. 강공은 1711년 4월 17일에 베트거를 남작에 임명하였고, 1714년에는 이제까지 13년간에 이르는 감금을 해제하여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마음고생과 이를 달래기 위한 강도 높은 음주와 흡연은 베트거로부터 건강을 빼앗았으며, 일찍 찾아노는 만년에는 반장님이 되었고1719년 3월 13일 겨우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강공 치른 하우스, 그리고 베트거, 마이센 요를 둘러싼 이들 세사람이 바야흐로 삼파전을 펼진 인간상은 유럽 자기사의 어려웠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유럽 최조의 자기 말병가로서의 영광을 한 몸으로 담당한 것처럼 보이는 베트거의 짧은 생애는 실로 비극적이었다.


1982년 그가 탄생한 지 300년에 해당한다. 때 맞추어 마이센 시에서는 이 행사를 위해 백자와 벽돌색 찾잔세트를 기념품으로 만들었는데 이 찻잔에는 모두 베트거의 서명과 샐몰년, 그위에 1982라는 연호가 들어가 탄생 300을 기념하는 물품임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양쪽 모두에 마이센 자기의 문장인 푸른색 쌍검마크가 붙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찻잔 접시쪽으로 이것이 베트거가 1707년에 소성한 적색자기의 모조품인 것이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이른바 석기로 보아도 좋다. 무게를 재보면 찻잔이 80그램, 그리고 찾잔 접시가 100그램이다. 크기 차이를 고려해 넣어도 적색 자기쪽이 무겁다. 베트거는 이 붉은 벽돌색을 뉘른베르크, 볼스라 불리는 점토를 사용해 만들고 있었다. 


또 찻잔 접시에는 부조장식이 있으며, 가키에몽풍의 울타리 문양에 소나무를 배열한 것이다. 베트거 시대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석기도 자기로 간주하였으며, 이윽고 여기에 투명감이 있는 유약을 바른 것이 생겨 초기 마이센 자기의 주체를 이룬 것이다. 이상이 마이센 요에 있어 자기사의 개요인데, 일본은 아리타 자기 문양이 본보기로 마이센에서 사용하게 된것은 베트거의 다음 세대로부터 아마 1720~25년경 화공인 헤롤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요한. 그레고리우스. 헤롤트는 처음에 타피스트리 화가로서 빈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720년 4월에 마이센으로 와서 23년에는 궁정화가 칭호를 부여 받았다. 즉 그는 화공(Maler)이었으며 선배인 베트거나 또는 그보다 약 10년 늦게 마이센에 온 후배 요한. 켄들러와 같은 그릇모양제작자는 아니었었다. 헤럴트 양식의 그림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는 것들은 이른바 시노와즈리로 가키에몽이나 이마리의 복사본은 아니다.


3. 마이센 요 (요: 도자기 만드는 제조 공장) 


마이센 요는 여러 책임자를 맞으며 다양한 문양의 자기들을 생산했다. 그러나 자기 생산 기술자들이 매수되어 기술이 유출됨에 따라 18세기 중반쯤에는 쇠퇴한다.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된 쉘브르(세브르) 자기의 시장 점유도 무시할수 없다


그러나 마이센 요에서 가키에몽이나 이마리 양식의 문양을 지닌 그릇이 활발하게 제작된 시기, 대략 1720년대 초에서 1770년대까지는 바야흐로 헤롤트의 재세기였다는것을 생각하면 아리타 모방에 관한 그의 관여도 당연히 상상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시노와즈리의 경우는 중국 도자기 문양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서양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자유럽게 제 멋대로의 형태로 시종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도안의 의미가 반드시 명확하지 않음에 비해, 가키에몽이나 이마리 모방본의 경우는 원문양이 그대로 충실하게 모사되고 있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들 문양 특히 독일에서 ‘Kakiemon-Dekor’라 불리는 것으로는 식물 문양에 송죽매, 사군자, 모란 등 그 위에 중국 고사로서 어린 사마온, 사마광이 물독을 깨 물에 빠진 친구를 구했다는 일화를 그린 도안이 특히 즐겨그려졌다. 또 이마리 양식으로는 ‘Brokatdekor’로 불리는 능직문으로 그릇 테두리를 장식하고 속에 화조를 배열한 것 등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가 명확하게 이해되고 있지 않았던 탓에 그들 동양문양이 차츰 변형되어 기묘한 형태로 변화해 간 예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공상의 동물인 기린이 그렇게 또 날다람쥐를 여우로 착각하여 그 이름도 ‘Fliegerder Fuchs’ 로 된 것 등이다. 메추라기 문양만은 거의 똑같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지금부터 대략 300년 전 동방과 서양과의 만남, 그것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멀리 인도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유럽으로 보낸 일본의 아리타 자기가 독일의 엘베 강가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그곳에서부터 유럽 각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 사실의 의의는 크다. 그러나 그 그늘에는 위에서 서술한 아우구스트 강공이나 라이프니치 또는 치른 하우스, 베트거라고 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헤롤트. 켄들러 기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명무명의 사람들의 고투와 애환이 흐르고 있다.


18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마이센의 영광에 금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기제저 비밀은 이미 여러경로로 새어나가기 시작했고, 마이센의 독점은 극히 단기간으로 끝났다. 1756년에는 드레스덴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는 불행한 사태도 발생하였다. 서방에서는 세브르(Seres)가 급속히 대두하여 마이센 시장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취미의 변화가 유럽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로코코에서 고전주의로의 이행 시기에 마이센은 그 시대의 움직임에 편승하지 않았다.


1774년 공장은 C. 마르콜리니 (C. Marcolini ; 1736~1814)가 주재하게 되었다. 그는 감상적인 풍속화를 특기로 한 그뢰즈의 영향을 받은 화가 요한. 에리아스. 자이지크(J.E.Zeissig)를 파리에서 초빙하여 화공 주임으로 삼았다. 감미로운 사랑의 장면, 픽츄얼레스크(Pictualesque)한 풍경, 목가적인 정경 등 평이하고 다소 안이한 그림이 성행하게 되는데 일부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마이센에 있어 큰 시련이었는데 그래도 공장은 가까스로 존속할 수 있었다. 1830년 경부터 로코코 양식의 리바이벌이 성행하여 70년 경까지 계속된다. 이 경향은 꽃과 레이스로 장식된 다양한 자태의 인형에 가장 잘 나타나는데 어쨌든 창조적인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마이센의 요 마크는 창업 당초부터 1725년까지 대문에 A와 R의 조합 (Augustus Rex의 약자)이었으며, 23년 경부터 KPM문자에 쌍검, 25년 전부터는 교차된 검이 정착되었다. 모두 유약 아래에 푸른색으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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