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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도 없는게 사장 행세…알고보니 ‘다방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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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2,347회 작성일 05-12-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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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도 없는게 사장 행세…알고보니 ‘다방사장’
사장이란 명함만 내밀어도 존경받던 시절



돈이 많고 직원들을 수백명 거느린 큰 사업을 하는 사람, 그 사장님은 그 시절 우리사회에 그리 흔치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장님 하면 하늘 같이 우러러 보았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 됨됨이도 따지지 않았다. 사장이라는 그 직함 하나에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몸을 낮췄다. 그 시절 그들의 성공에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수 없는 어려움을 헤쳐 나와야 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장님 하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그들의 성공 이면에는 한결같이 새벽에 별을 보고 나와 저녁에 별을 보고 들어가는,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냈다는 것이다. 때로는 신문을 들고 때로는 철가방을 들고 총알같이 도시의 골목골목을 뛰어 다녔다.

기술만 배울 수 있다면 돈을 한푼도 받지 않아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했다. 모두다 일자 무식꾼이다 보니 잔머리를 굴리고 요령을 피울 줄을 몰랐다. 소처럼 앞만 보고 우직하게 일만 했다. 묵묵히 일한 대가로 기술도 배우고 조그마한 돈도 모았다. 세상 돌아가는 인심도 배웠다. 돈이 흘러가는 방향 감각도 잡았다. 그쯤 되면 세상살이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 이제는 시작이다. 모두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의 돈은 내 돈이다”며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이제까지 밑바닥에서 갈고 닦은 기술과 끈질긴 집념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해 갔다.

못 배운 놈이 몸뚱아리 하나로 사장이 되었으니 빛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절은 시시하게 해 가지고는 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 사장은 만인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빵집 사장도 자장면집 사장도 가게 하나 내는 데는 기술도 기술이었지만 자금이 꽤 필요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게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10여년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시골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사장님이었다. 마을의 중대사가 있으면 기꺼이 막걸리를 한말 기부했다. 마을 다리를 놓아도 초등학교 운동회 때도 봉투를 내 놓으며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과시했지만 밉지는 않았다. 또 동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따뜻한 마음씨도 가졌다.

아들놈이 자장면집 사장을 해도 온 동네에 애고 패고 다니며 옆집의 기를 팍팍 꺾는 재미가 대단했다.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 밖에 졸업을 안 했지만 아무개 아들 고등학교 나온 것보다 낫다며 온 동네를 떠들고 다녔다. 저 머리 좋고 똑똑한 놈을 고등학교만 졸업을 시켰더라면 라디오에 나오는 이병철이 보다 더 큰 사장이 되었을 텐데 돈 없어 공부를 못 시킨 것이 한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옆집 할매들도 사장님 덕에 나팔이라도 불어볼 요량으로 맞장구를 치며 사장 엄마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다.

주위의 훈풍에 신바람이 났는지 한번 터진 자랑 보따리는 흘러 넘쳤다. 그리고는 저 영감이 노름에 미쳐 소 두 마리 값을 날리는 바람에 아들 공부를 못시켰다며 갑자기 불똥이 영감한테로 옮겨 붙었다. 지은 죄 때문에 마누라가 쏘아붙이는 따발총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영감은 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내 소한 마리 밖에 안 팔아먹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큰 물 나던 그 해와 작은 아들 나던 해에 며칠 밤 날을 새며 무엇을 했느냐고 다그친다. 내 그 돈 갚는다고 생똥을 쌌다며 한번만 더 손장난 해봐라 손모가지를 비틀어 놓겠다고 그 때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독기를 품어냈다.

분명 어려웠던 그 시절은 사장님 소리만 들어도 자랑할 만 했다. 사장님을 자식으로 둔 부모들도 온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시대의 분위기에 재빠르게 편승해 사장이라고 깝죽거리며 눈꼴사나운 일도 많았다. 졸부들도 구멍가게를 하나 내놓고 다방을 들락거리며 “내가 내네”하며 괜히 어깨를 우쭐거렸다. 다방 아가씨들이 사장님하며 비행기를 태우는 바람에 시건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입을 댈 때나 안 댈 때나 동네 일에 온갖 간섭을 하며 유지 행세를 했다.

어느새 흔하고 흔해져 너도나도 ‘사장님’

본업은 뒷전이고 시간만 나면 다방에 앉아 죽을 쳤다. 구두쇠 하면 면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다방아가씨들의 치맛자락에는 여기도 커피 한잔, 저기도 커피 한잔 다방 인심은 푸졌다. 다방 아가씨들이 옆에 잘 앉아있다가도 그 영감만 들어오면 사장님 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달려가기 바쁘다.

다방 아가씨가 자리를 옮기자 성이 난 손님들은 “우리는 손님 아이가?” 마담을 향해 고함을 버럭 지르면 “손님도 손님 나름이지…저 분은 사장님 아입니까” “사장은 무슨 얼어죽을 사장…닭다리 자르는 것도 사장이가?” 아이구 오늘 아침에 밴댕이 소갈머리를 삶아 먹었나 속도 좁쌀이지…다방아가씨들이 살살 간지럼을 피운다. “이 읍내에 내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여당의 면책이고 내 말 한 마디면 이 다방 문 닫는다…내가 누군 줄 아냐?” 알아서 기라고 잔뜩 거드름을 피워 보지만 말발도 먹어 주지 않는다. 다방 마담은 한 술 더 떠 우리는 순사 오라비가 와도 죽지 않는데 배추 이파리에는 꺼뻑 죽는다”며 약을 바짝 올렸다. “오라버님은 이 동네서 방귀깨나 뀌는 모양인데 저 쪽 가서 많이 뀌셔”하며 택 쏘아 버린다.

나만 보면 저 쪽으로 가던 놈도 뛰어와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는데 다방 아가씨에게 두 방 쏘이고 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다 보니 사장이 되는 것은 누구나 간절한 소망이었다. 점포를 내 사업만 시작하면 하루 아침에 떼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짓던 농사를 내 팽개치고 돈 벌어 한번 폼 나게 살아보겠다며 사업을 시작했다가 거지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한 공업화는 우리나라의 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자고 나면 거대한 공장이 우뚝 솟아올랐다. 전국의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공장 주변에는 식당에서부터 문방구•빵집•철물정부동산 소개소•다방까지 별의별 장사가 들어섰다. 엉겁결에 큰돈을 쥐게 되자 졸부의 추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매일 밤 고급 술집에 드나들며 방탕한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사냥총을 사 들고 걸핏하면 시골의 산으로 쫓아다니며 들짐승을 잡는다고 총질을 해댔다.
그런 졸부 사장님이 한둘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사장님하고 부르면 열 사람 중에서 네 다섯 사람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사장님 홍수시대였다. 그 때부터 하늘같은 사장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의 입에서도 흔해 빠진 것이 사장이라며 그 존경의 대상에서 장사치로 깎아 내렸다.

그래서 사업깨나 하는 사람은 사장님은 격이 낮다며 모두다 회장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하도 사장님이 많다보니 사업을 한다고 명함을 내밀면 첫 마디가 다방 사장이네(다방 아가씨나 불러주는 사장) 하며 핀잔을 주는 것도 다반사였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김판웅(57)씨는 사장이야기만 나오면 30여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고 한다. 자신은 군에서 제대하고 취직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일찍부터 객지에 나간 옆집의 친구가 사장이 되었다. 그 날부터 스트레스가 쌓여 죽을 지경이었다. 옆집 친구의 어머니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아들은 공부를 많이 못했는데도 사장이 되었는데 누구 집 아들은 대학을 나와 가지고 빌빌거리며 놀고 있다고 떠벌렸다. 동네 사람들마다 사장 아들을 두었다고 부러워하자 기가 살아 펄펄 날았다. 반면에 자신의 어머니는 속이 새까맣게 탔다.

사람들마다 헛 공부했니 공부를 꼴찌 했느니 그 집에 아들 공부시킨다고 돈만 날렸다며 수근거렸다. 어머니는 읍내에서 대학 나온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인데 왜 그리 못 났느냐며 덜덜 볶았다. 동네 사람들 보기 부끄럽다며 빌어먹더라도 도시로 나가라고 매일 같이 떠밀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어머니가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놈도 사장하는데 대학까지 나온 놈이 방구들을 지고 있다고 다시 덜덜 볶기 시작했다. 또 그 놈의 사장, 그 말은 죽기 보다 더 듣기 싫었다.

갑자기 온 몸에는 두드러기가 솟아올랐다. 똥물을 지고 나르는 것도 사장이냐 불쑥 내 뱉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눈을 번뜩이며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돌았다. ‘요놈의 여편네’ 맛 좀 봐라는 눈치였다. 그 때부터 그 집 아들이 부산서 똥물 푼다고 동네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포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사장님이 똥 푸는 사람으로 돌변했다. 동네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 놈이 무슨 재주로 모두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 소리는 바로 옆집에 전달되었다. 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옆집 친구의 어머니가 얼굴이 벌겋게 해 가지고 들이 닥쳤다. 다짜고짜 말도 없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밥상 위에 내 던졌다. 그리고 우리 아들 똥물 푸는 것을 봤냐…봤다…옥신각신 대판 싸움이 붙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뛰어 나와서 말리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제 자식 못났다는 이야기 듣기 싫은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