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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정신 부실하면 당산할배 노여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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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2,156회 작성일 05-1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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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정신 부실하면 당산할배 노여움 산다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수호신 당산나무



마을마다 수 백년 된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있다. 마을 입구나 한복판에 버티고 선 당산나무는 언제 심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동안 마을의 사람들은 수없이 바뀌고 바뀌었지만 대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흉년과 풍년 그리고 질병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애환을 늘 함께 했다. 그 당산나무만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일들을 하나 하나 기억하고 있다. 더운 여름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모여들었다. 들일을 하다가 지치면 잠시 한숨을 돌렸던 곳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길손도 잠시 쉬어가라고 붙들어 앉혔다. 아이들에게는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재주를 부린 놀이터였다. 먼길 가는 새들에게는 하룻밤 묵어 가는 안식처였다. 이처럼 당산나무는 늘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친구였지만 마을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고했을 정도로 마을 큰 어른이자 수호신이었다.

취직이나 입시를 앞두고도 ‘당산할배’의 영험을 받기 위하여 정성스레 빌었다. 몸이 아파도 낫게 해 달라고, 일제 때는 징용에 끌려가면서 무사하기를‘당산할배’께 빌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를 매우 신성하게 여겼고 해마다 당산제(동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었다. 당산제는 마을 사정에 따라 매년 정월 대보름날과 10월 초하룻날에 주로 지내고 있다. 수 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당산제는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많이 간소화 됐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마을에서 지속되고 있다.

해마다 당산제를 닷새 앞두고 제관을 정하게 되는데 그 날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당산나무 아래 모여 풍물을 치며 서낭대를 잡았다. ‘당산할배’를 불러내 제사를 지낼 제관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서낭대는 주로 마을의 도사나 무당들이 잡았다. ‘당산할배’를 모신 서낭대가 앞에 서고 풍물패가 뒤따랐다. 도사가 잡은 서낭대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나면 바쁘게 골목길로 내달음 쳤다. 그리고는 ‘당산할배’가 왔다며 닫힌 삽짝을 열라고 서낭대가 심하게 흔들린다. 문이 열리자 서낭대가 단숨에 마당을 한바퀴 돌아 멈췄다. 그 집은 ‘당산할배’의 뜻에 따라 그 해의 동제를 지내게 된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동제는 마을의 가장 신성한 일 중의 하나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할배’가 동제를 지낼 집을 선택할 때는 집안에 우환이 없고 가장 깨끗한 집으로 들어간다고 여겼다. ‘당산할배’는 그 해 그 집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고 믿었다. 병자가 있는 집이나 궂은 일이 일어난 집은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동제를 지내게 된 집은 그 제사만 잘 지내면 그 해는 우환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암시한 셈이다. 제관으로 선정되는 그 날부터는 모든 행동을 삼가고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당산제를 지내는 3일 전부터는 정신을 해야 했다. 부부간에 매일 목욕 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했다. 화장실에만 갔다와도 속옷을 갈아입었다. 제사상에 올릴 놋그릇은 광이 번쩍 번쩍 나도록 닦았다. 두 눈으로 궂은 일을 보지 않기 위하여 바깥 출입도 하지 않았다. 삽짝에는 금줄을 쳐 신성구역 임을 알리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다. 당산나무에도 금줄을 두르고 주변을 청소하고 황토를 뿌렸다. 온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으고 경건한 마음자세를 가지라는 의미에서였다.

동제를 지내고 나도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당산제를 지낼 때까지 1년 동안은 상가 출입은 일절 금해야 함은 물론 결혼•돌잔치 등 길사에도 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집안의 대소사에도 가지 못했다. 상주나 복을 입은 사람도 부정을 타 ‘당산할배’가 노한다며 동제를 지나고 일정기간동안 그 집에는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다.

해마다 지극정성 동제 지내며 무사평안 빌어

마을사람들은 당산제를 잘 지내면 득남을 하고 그 집안에 좋은 일이 있어 큰복을 받고 그 반대로 당산제를 잘못 지내면 ‘당산할배’의 노여움을 받아 제관의 집안과 마을에 불행이 따른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산할배’의 낙점을 받은 집은 음식에서부터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내야 했다. 당산제를 지내는 경비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충당했다. 돼지도 한 마리 잡았다. ‘당산할배’께 올릴 음식은 나물 한 젓가락도 입에 대지 못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에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삼갔다.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게 머리는 수건으로 둘러 싸맸다. 아이들이 ‘당산할배’가 먹을 음식에 먼저 손을 댈까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을 했다. 제사 음식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으며 풍년을 기원했다.

정신을 들이며 대대로 지낸 동제가 산업화로 인해 세월이 변하면서 지금은 모두 꺼렸다. 너무나 행동의 제약을 많아 받고 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당산나무에 대한 믿음이 약화된 데다가 모두다 도시로 떠나고 제사를 지낼 만한 젊은이들이 없는 것도 큰 문제였다. 마을마다 가구수는 매년 줄어 제를 모시던 사람이 수년 내에 또 모시게 되는 것도 이유였다. 최근 들어 제관선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주민공동으로 동제를 지내는 곳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창녕에 사는 김인구(51•가명)씨는 60년대 말 자신의 집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그 해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 가셨다고 한다.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 3일간 정신도 대충해 집에서 지내는 제사처럼 그렇게 지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기 전날 밤에 자신의 아버지 꿈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대문으로 허겁지겁 들어서서는 좌우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리고는 쯧쯧하며 혀를 두 번 차고는 들고 있던 행주 3개중 한 개를 부엌에 던지고는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꿈이 선명해 자신의 아버지는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밖은 둘째 닭이 울고 있어 한밤중을 갓 지나고 있었다. 하도 마음이 뒤숭숭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동제에 올릴 나물을 삶아서 물에 담가 두었는데 어느새 송아지가 와서 입을 담가 물을 먹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나물을 버리고 다시 삶아서 상을 차려야 했는데 들일이 바빠 그냥 올렸다고 한다.

자정이 넘었다. 집에서 당산나무까지는 200m 정도 떨어져 제를 올리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였다. 주위는 그믐밤이라 칠흑같이 어두웠다. 당산나무 아래는 초저녁에 켜둔 초가 반쯤 타고 있었다. 다시 촛불을 갈아 켜고 제사를 지내려는데 저 쪽 산길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휙 일더니만 한쪽 촛불이 꺼져 버렸다. “이보시오 어디를 가려는데 이 길이 맞는지요.” 계속 고함을 치며 물어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부정을 탄다며 못 들은 척 하라고 했지만 자꾸 길을 묻는 바람에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어 큰 재를 넘어야 된다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인기척이 온데 간데 없어졌다. 낮에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고 일년에 한두 사람이 넘어 다닐까 말까 하는 그 높은 재를 한밤중에 넘는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차를 타고 갈 것이지 모르는 길을 물어가면서 한 밤중에 그 험한 산길을 넘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란 말인갉. 자신을 향해 묻고 또 물었다. 아버지는 혹시나 싶어 아무리 그 재를 바라보아도 사람이 올라가는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불안한 예감에 온 몸이 오싹 해지더니 겁이 덜컹 났다.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그 후 자신의 집은 물론 동네는 안 좋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집 멀쩡한 소가 죽은 를 놓는 것을 필두로 동네의 소들이 줄줄이 유산을 했다고 한다. 소를 자식만큼 애지중지 하던 시절에 송아지 한 마리를 잃었다는 것은 목놓아 통곡할 엄청난 충격이었다. 불행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모심기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그 해 돌아가셨다. 평생 고함소리 한번 안나던 마을에 이웃 간에 싸움이 붙어 지서에 불려 가는 일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동제에 정신이 부족해 동네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고 뒤에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부산에서 자영업을 하는 박호국(51)씨는 70년대 초반 자신의 집에서 동제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는 동안 집안에는 내내 긴장감이 흘렀다. 정신이 부족하면 가정의 우환은 물론 동네에도 우환이 많다며 지극정성으로 동제를 지냈다. 방에는 머리카락 하나 안나오도록 빛이 번쩍 번쩍 나도록 닦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3일간 정신기간에 매일 찬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했다. 화장실에 갔다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밥도 거의 굶다시피 했다. 음식도 만들어 혹시 벌레라도 들어 갈까봐 깨끗한 장독에 넣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방에 자지 않았다. 조카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가축들도 ‘당산할배’의 제사상을 차리는데 해가 될 까봐 밖으로 내놓지 않고 모두다 가두었다. 그렇게 정신을 들인 탓인지 자신의 집은 물론 그 해 마을에는 좀도둑 하나 안 들 정도로 별탈 없이 잘 넘어 갔다고 한다. 그 시절 동제는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아 일상생활에 불편이 컸지만 온 동네의 편안함을 위해 기꺼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