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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농사꾼…그렇다고 장가도 못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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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2,449회 작성일 05-12-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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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농사꾼…그렇다고 장가도 못가나?”



거센 공업화의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농촌에는 젊은이들의 씨를 말려 버렸다. 특히 처녀들은 눈을 닦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평생 뼈가 부러지도록 일해 봤자 배부르게 밥 한 그릇 제대로 먹기 힘들고 남은 것은 골병뿐이라며 부모들은 자식들을 도시로 내쫓았다. 한마디로 앞길이 뻔한데 내 자식만은 농사를 짓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식모살이를 하든 자장면 심부름을 하든 간에 한시라도 일찍 농촌을 떠나는 것이 낫다며 등을 떼밀었다. 젊은이가 없는 농촌은 하루 하루가 삭막해졌다.

70년대 도시로 가는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어 닥쳤다. 시골에는 일순간에 나물 바구니를 든 봄처녀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 전에만 해도 산 넘어 온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이맘때쯤이면 양지바른 언덕 밑에서 냉이를 캐는 처녀들이 흔했다. 그 냉이 바구니를 향해 불어대던 총각들의 휘파람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대바구니에는 냉이도 담고 휘파람도 담았다. 그리고 봄볕과 아지랑이, 사랑도 담았다. 그것은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자 40대 이상에게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이제는 막 터져 나온 냉이랑 쑥을 뜯어 담았던 대바구니, 공업화와 함께 한 폭의 풍경화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처녀가 없는 농촌에는 총각들도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농촌에는 젊은이를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아 농촌을 지키겠다고 눌러 앉았던 총각들 마저 일년도 못 배기고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만다. 세상의 눈이 무서웠던 것이다. 보는 사람마다 또래들은 다 도회지로 취직해 떠났는데 저놈은 못나서 이 골짝에 처박혀 농사나 짓고 있다는 손가락질 때문이었다. 부모들은 빈집만 늘어가는 시골에서 자신의 아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남아 있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웃집에라도 마실을 가면 누구 집 아들은 취직을 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며 모두다 자식 자랑이 만 바가지다. 그것도 모자라 자식 잘 났다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기고만장 하는 바람에 자기 자식은 촌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들은 너는 뭐가 모자라 취직도 못하느냐, 놀아도 도시에 나가서 놀아라며 사흘이 멀다하고 자식을 달달 볶았다. 부모님의 등쌀은 견딜 수 있었지만 문제는 결혼이었다. 처녀들은 모두다 도시로 돈벌러 떠나고 없는데다 그나마 남아있는 처녀들조차도 농사는 지긋지긋 하다며 시골로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평생 일해 봤자 보리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고생문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농촌 총각과는 아예 맞선의 맞자도 못 꺼내게 했다.

쌀 가마니 짊어지고, 너도 나도 도회지로

우여곡절 끝에 선을 보아도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처녀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기 바빴다. 맞선을 수 십 번을 본 총각들이 수두룩했다. 부모들은 맞선만 보면 퇴짜를 맞으니 자식의 나이는 들어가고 안달이 났다. 자신의 나이보다 적은 이웃집은 손자까지 보았는데 이러다가는 자식 총각귀신 만들지나 않을까 머리를 동여매고 누웠다.
장가를 들기 위하여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도회지에 방을 얻어 놓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부산에 사는 김정구(54)씨는 군에서 제대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맞선을 10번을 넘게 보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농사를 짓는다고 퇴짜를 맞았다. 퇴짜도 한두 번이지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집안식구들 보기도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었다. 거기서 오는 깊은 열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남자가 박력이 없어 그렇다고 두 사람만 모이면 입을 쪼아댔다. 큰누나도 선 보러 간 놈이 십리 가다가 오리 가다가 “예 예”만 하고 있으니 내라도 너 같으면 시집을 안가겠다고 몰아 세운다. 집에서는 입이 따발총 같고 깔끔을 혼자 다 떨면서 하필 맞선 자리서 머리는 왜 긁어 제치고 말은 더듬거리며 자빠졌느냐고 욕을 퍼부었다.

적당히 허풍도 떨고 분위기를 리드해야지 누가 남자인지 구분이 안 간다, 그렇게 용기가 없으면 거시기 떼고 다니라며 불난 속에 부채질을 해댔다. 동네 사람들이 또 퇴짜 맞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골목 밖으로 나가는 것이 죽기보다도 더 싫었다. 이번만은 곰보든 째보든 간에 장가를 가야 된다. 여기서도 또 퇴짜를 맞으면 남세스러워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비장한 긴박감이 돌았다. 그래 이번만은 “예 예”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길로 부산에서 자취하고 있는 친구에게 한 두 달 빈대를 붙었다. 순식간에 동네에는 좋은 곳에 취직을 했다고 소문이 돌았다. 평소 같으면 어머니가 온 동네방네 다니며 중매를 서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도 코방귀만 뀌던 사람들이 이제는 제 발로 찾아와 중매를 서겠다고 줄을 섰다.

드디어 맞선을 보는 날 친구회사 작업복을 빌려 입고 나갔다. 친구에게 회사 이름과 위치, 하는 일을 밤을 새워가며 교육을 받은 것을 처녀가 묻는 말에 그대로 읊었다. 여자 쪽에서도 상당히 호감을 가져 급물살을 탔다. 그 뒤로 낮에는 회사 출근 핑계를 대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만났다. 문제는 방심이었다. 회사의 이름을 묻는데 머릿속에만 빙글빙글 돌뿐 도무지 첫 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거기에다 한 술 더 떠 회사에서 하는 일을 엉겁결에 품질 관리과에서 선반을 잡는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품질관리과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몰랐으니 완전히 앞도 뒤도 안 맞는 대답이었다. 더 기가찬 것은 자신이 다닌다고 이제까지 이야기한 회사는 전자회사인데 선반이 튀어 나왔으니 말이다. 여자는 순간적으로 속았다. 백수라고 판단했는지 얼굴빛이 변했다.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당신이 다니는 회사는 선반이 아니라 납땜을 하는 고데기를 들어야 맞는 것이 아니냐며 쏘아 붙였다. 한방에 자존심이 짓밟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는 이 양반이 나를 축구 바보로 아는 모양인데… 픽 하며 코에 헛 바람을 두 번 불어제치더니만 그대로 돌아 서 버렸다.

맞선서도 번듯한 직업 없으면 퇴짜 일쑤

순간적으로 가슴에 주먹만한 울화통이 치솟았다. 달려나가 찻값을 내려는 처녀를 밀어내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도 찻값을 낼 돈은 있다” “ 그래 나는 백수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장가도 못 가나” “촌놈 백수다” “촌놈은 꼬리가 달렸나,” 다방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뜻하지 않은 사태에 아가씨는 오도 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방에 있던 사람들이 “맞다 맞다”며 갑자기 박수가 터졌다. 고함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직업도 좋고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됨됨이가 제일 중요하다 살아보면 언젠가는 실감날 날이 있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덕분에 결혼을 해 한동안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부산으로 나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펄쩍 펄쩍 뛴다고 한다.

진주에 사는 박을자(가명•53) 씨는 부산에서 직장을 다닌다고 해 맞선을 보고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열흘이 지나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직장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있다던 자전거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자신은 도회지서 커 호미자루라고는 한번 만져 보지도 않았는데 거친 들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시어머니가 밭에 나가 정구지를 베어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자 호미로 뿌리째 뽑았다. 상추를 뜯어오라고 하자 작은 것은 놓아두고 솎아 뽑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말끔하게 뽑아버렸다.

시어머니가 보고는 너무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 없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아무리 자식 장가를 못 보내 쩔쩔 맸지만 며느리 하는 짓에 천불이 난다며 자신의 가슴을 쳐댔다. 밥도 제대로 못한다고 솥뚜껑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바람에 시어머니만 부엌에 들어오면 주눅이 들어 되는 일도 안되었다. 박씨는 도저히 농촌생활은 못하겠다며 도회지로 나가서 살자고 남편을 눈물로 졸랐다. 그 때마다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래서 남편이 안가면 자기 혼자라도 떠나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모두다 피곤해 잠든 밤을 이용해 옷 보따리만 챙겨 들고 20리 길을 단숨에 내달렸다. 한밤중이라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다급함에 무섭지도 않았다. 역전에 서니 옷은 땀에 젖어 비를 맞은 것 같았다.

그 길로 서울행 열차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자신의 친정에는 시댁 식구들이 들이 닥쳐 사람을 찾아내라 결혼비용을 물어내라고 다그쳤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입에서 입으로 건너면서 동네에는 바람이 나 도망을 갔다고 쑥덕거렸다. 그 바람에 어머니 아버지는 더 화병이 치솟아 몸져누웠다. 빨리 돌아와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굿판까지 벌였다. 아버지께 다리몽둥이가 부러질까봐 집에 가지 못하고 15년 만에 친정에 가니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이마에는 손마디 같은 주름살이 깊게 패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살아온 세월이 야속해 어머니를 안고 한참을 울고 나니 너무 너무 속이 시원해졌다며 지나간 그 시절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