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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맞선 장소는 다방이 아니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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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1,930회 작성일 05-12-0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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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맞선 장소는 다방이 아니었다는데...
“옆집 딸 맞선보러 왔단다” 담 위로 솟은 얼굴들



음력으로 섣달이 되면 해를 넘겨서는 안 된다며 결혼 적령기의 딸과 아들을 둔 집에서는 한 살을 더 먹기 전에 시집•장가를 보내기 위하여 마음이 급했다. 1960~70년대 초만 해도 여자 나이 스물 너댓 살이면 나이가 많다고 아예 맞선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주위의 권유로 맞선을 보아도 나이가 많다고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그 판국에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은 끔찍했다. 혼기를 놓친 집에서는 중매쟁이와 짜고 한두 살 정도 적게 속이기도 예사였다. 나이 때문에 몇 번 퇴짜를 맞고 나면 부모들은 처녀 귀신 만들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다 보니 집안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다 중매쟁이였다. 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중매를 서달라고 부탁을 했다. 처녀들은 스무 살만 넘어서면 부모들은 여기저기에 좋은 혼처가 있으면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을 한다. 한 살이라도 적을 때 결혼을 서둘러야 적당히 주가를 올려가면서 사윗감을 입맛대로 골라 보겠다는 계산에서였다.

맞선을 보는 장소도 지금처럼 다방이나 커피숍이 아니고 처녀 집이었다. 중매쟁이를 앞세우고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입을 타고 순식간에 동네로 퍼졌다. 동네 처녀들은 하던 일을 놓고 맞선을 보러온 총각을 훔쳐보겠다고 우르르 몰려와 이쪽 저쪽에서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이 뒤를 졸졸 따라 들어간다. 여기 저기서 어깨너머로 보고 “좋아 보인다, 별로다” 금방 인물평을 쏟아냈다.

동네 총각들은 옆집 금순이가 선을 본다는 말에 괜히 심술이 났는지 말없이 지나가는 강아지를 툭 찬다. 그리고는 작대기로 남의 집 돌담을 툭툭 두드린다. 옆에서 말만 걸어도 귀찮다는 듯이 신경질이다. 그래도 심사가 꼬여만 가는지 작대기를 땅 바닥에 두 번 내리치니 죄 없는 작대기만 뚝딱 부러지고 만다. 맞선 날에는 처녀 집에도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느라 초비상이 걸렸다. 소가 없는 집은 이웃집 소를 잠시 몰고 와 외양간에 매어 두었다. 나락 가마니도 눈에 잘 띄는 곳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작은방에 있는 재봉틀도 큰방으로 옮겼다. 작은 아버지 자전거도 가져와 마당 복판에 세워두었다.

중매쟁이는 처녀 집 문 앞에 들어설 때까지 “이 동네서 제일 부자다. 사람 좋고 하나도 나무랄 곳이 없다”며 침이 마르도록 자랑이다. 내 말이 거짓말인지 참말인지는 처녀 집 대문에만 들어서면 안다고 큰 소리를 땅땅 친다. “그 집에 장가들게 되면 팔자를 고치게 된다”고 한 말을 하고 또 하고 귀에 못이 박였다. 즐비하게 늘어선 나락가마니에 마당 복판에 선 자전거, 중매쟁이 말대로 부잣집은 부잣집인 모양이다. 맞선에 따라온 총각 부모들은 흡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중매쟁이를 붙들고 꼭 혼인이 성사 되도록 힘 좀 써 달라고 신신 부탁을 한다.

60년대 초 맞선 장소는 다방•커피숍 아닌 처녀집

총각 집에도 맞선을 보는 날은 신경이 곤두섰다. 어려운 살림에 양복 한 벌 사 입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네에 한 두벌 뿐인 친구의 양복을 빌려 입었다. 구두도 없어 온 동네를 뒤져 빌려 신었다. 친구의 손목시계도 빌려 찼다. 양복과 구두•넥타이까지 온 동네를 돌며 빌려 한 폼을 잡은 셈이다. 동네 한 두벌뿐인 양복과 구두 서너 켤레는 이 친구 저 친구들이 매일 같이 빌려가는 바람에 맞선 전용이 되어버렸다.

빌려 입은 양복이라 풍덩해 촌티가 쪼르르 흘렀다. 정작 본인은 넥타이까지 매고 나니 날아 갈 듯했다. 거울 앞에서 보고 또 봐도 너무 근사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니 맞선 길은 발걸음이 핑핑 날아 올랐다. 벌써 몇 년째 맞선을 보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다. 처녀 쪽에서 마음에 들면 총각 쪽에서 거절을 했다. 총각 쪽에서 마음에 들면 처녀 쪽에서 틀었다. 그 이유도 키가 작다, 깡마른 것을 보니 성깔이 있겠다, 눈웃음을 살살 짓는 게 바람을 피우겠다는 등 온갖 트집을 잡았다.

당사자들이 좋다고 해도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양측 집안 어른들의 의사가 중요했다. 당사자들은 외모를 따졌지만 부모들은 가문과 처녀 총각의 사람됨됨이와 그 집의 생활형편을 살폈다. 백 석을 하는 부잣집이라도 상놈의 성이라고 마다했다. 한마디로 조상 대대로의 이력까지 까발려 졌다. 당사자들은 마주 앉아 얼굴만 한번 보는 것이지 사실상 그 결혼은 집안 어른들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정작 본인들은 내키지 않아도 집안 어른들이 마음에 들면은 결혼을 안하고는 못 배겨냈다.

집안 대대로 글을 읽은 선비 집인데 그런 곳을 마다한다고 집안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 집이 어떤 가문인데 그렇고 그런 가문과는 혼인을 할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밀어 붙였다. 설사 시집가서 딸자식이 밥을 굶어도 양반 소리는 들어야 한다는 체면이 먼저였다. 또 하나는 용하다는 점 집을 찾아가 사주와 궁합을 맞추어 보는 것은 필수였다. “이 결혼을 하면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난다. 남자 사주에 역마살이 끼여 밥그릇 하나 가질 형편이 못돼, 이 여자 사주에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는 등 궁합이 나쁘다고 도사가 고개를 흔들면 그 혼담은 없었던 일로 했다.

연애 결혼이라 하더라도 도사가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은 “남의 집 삽짝 문 닫는다”고 펄쩍 뛰었다. 결혼을 고집하다가는 할아버지 담뱃대가 몇 개나 부러졌다. 그러니 당시의 혼인은 백가지가 다 좋아야 했다. 지금은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앞으로 큰돈을 벌며 잘 살 수 있다고 하면 썩 내키지 않아도 결혼을 시켰다.

울산에 사는 김칠숙(58)씨는 처녀 때 4살 많은 동네 오빠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부모들과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며 거의 매일 만났다. 당시 시골은 한 동네 처녀 총각들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자, 동네 알려지는 날이면 엄청난 흉이었다. 그러니 동네 처녀 총각끼리 결혼은 생각도 못했다. 딸을 둔 부모들은 바깥 출입을 엄하게 단속했다. 밤 마실을 다니다가 아버지께 발각되는 날에는 다리몽둥이가 성하지 못했다.

동네총각들 괜한 심술에 지나가는 강아지 툭 차고

동네 오빠를 아버지 몰래 만나기 위해 담을 넘어 다녔다. 자신의 부모는 올 가을에는 자신을 시집 보내겠다며 중매를 서 달라고 온 동네방네 에고 다녔다. 마침 좋은 총각이 있다고 맞선이 들어와 선을 보았다. 동네 오빠가 마음에 걸려 맞선을 안보겠다고 버텼지만 그럴수록 아버지의 불호령은 더 했다. 여자가 시집을 가야 할 나이가 되면 가야지 무슨 잔소리가 많으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동네 오빠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진짜 집안에 곡소리가 날 것은 뻔해 속만 끙끙 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맞선 본 총각은 그만하면 됐다. 뭐 하나 나무랄 것 없다”며 결혼을 적극 밀어 붙였다. 중매쟁이도 하루에 열 천 번을 들락거리며 그만한 혼처는 없다며 불을 지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주단자가 오고갔다. 결혼 소문은 금방 온 동네로 퍼져 나갔다. “동네 오빠는 배신했다”며 맞선을 본 총각 집으로 달려가 자신과 결혼을 할거라고 일을 벌이는 바람에 두 집안은 물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중매쟁이는 헐레벌떡 자신의 집으로 달려와 애인을 놓아두고 맞선을 보는 상놈의 집구석이라고 삿대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딸 단속을 잘 못했다고 욕을 끌어 부었다. 어머니는 너하고 나하고 죽자 우리 집은 인제 망했다며 목놓아 울었다.

총각 집에서는 결혼비용을 물어내라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동네 사람 둘만 모이면 누구 집 딸 바람이 났다고 쑥덕거렸다. 부모님의 반대로 끝내 동네 오빠와의 결혼은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동안 남세스럽다며 두문불출했다. 자신도 이모 집으로 쫓겨갔다. 오빠와의 관계로 혼담이 깨지는 바람에 정상적인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자식이 하나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이야 처녀 총각이 연애하는 것이 흉볼 일도 아니지만 그 시절은 연애한다는 소문만 돌아도 중매가 들어오지 않아 평생 처녀로 늙을 판이었으니 부모님의 노발대발한 심정도 이해가 간다며 그 시절을 떠올린다.

합천이 고향인 김순영(62)씨도 맞선을 열 번을 넘게 보았다. 맞선을 볼 때마다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또래들은 다 시집을 가고 자기 혼자 남았으니 딸을 처녀로 늙힐까봐 머리를 매고 누웠다. 선을 볼 때마다 방한 칸의 오두막집을 보고는 돌아서기 바빴다. 보다 못한 동네 인심 좋은 부자 영감이 과년한 딸을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한다며 맞선을 자기 집에서 보도록 했다. 그 영감 집에서 선을 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남편이 장가를 오던 날 초가집에 단칸방을 보고 자신을 속였다고 펄쩍 뛰었다. 분명히 선을 볼 때는 방이 많은 초가집이었는데 오두막집이라니 기절 초풍을 할 지경이었다. 속았다며 그 길로 돌아서서 가는 것을 자신의 어머니가 “이 사람아 평생 처갓집보고 살 것인가 두 사람이 벌어 잘살면 되지”라며 신랑의 다리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자기 남편이 미워 이 놈의 영감쟁이 머리에 찬물을 한바가지 퍼붓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