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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대단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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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1,592회 작성일 05-09-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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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대단지 '사태'

인간의 피눈물을 요구한 신도시 건설



시민들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지켰다."우리는 굶어 죽을 지경인데 무슨 팔자가 좋아 택시를 타는냐"며 모두 차에서 내리게 했다. 취재 차량도"굶어 죽는 마당에 신문 필요 없다"며 가로막았다. 성난 민심은 극도에 달했다.

때마침 참외를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갔다. 배고픔에 지친 시민들은 참외를 보자 이성을 잃고 모두 차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정신 없이 참외를 먹기 시작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참외 한 트럭이 없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흙탕물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먹었지만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19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에 버려진 시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도시근대화에 떠밀린 사람들

1960년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잘 살아보겠다는 신념 하나를 갖고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었다. 상경해봤자 더 나은 생활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지만 농사는 지을수록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로 더 비참했다. 땡전 한푼 없이 몸뚱이 하나만 믿고 서울로 왔다. 이들은 허름한 변두리를 찾아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댔다. 달동네라 불리는 이 판자촌은 오도 갈 데도 없는 도시 빈민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마저도 마음놓고 살 수 없었다.

1968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18만 채의 무허가 건물 중 우선 5만 가구를 옮겨 20만이 살 수 있는 단일 생활권의 새로운 위성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 거대한 발표에도 대부분의 판자촌 사람들은 먹고살기에 바빠 관심이 없었다. 서울시는 35만 명 규모의 위성도시 건설, 대전시 규모의 새 도시를 건설한다며 꿈의 낙원처럼 광주대단지를 홍보하였다.

서울시는 판자촌을 정리하기 위해서 가고 싶은 사람만 이주시킨 게 아니고 모두 강제로 이주시켰다. 특히 당시 가뭄이 가장 심했던 호남지역의 농민들이 광주대단지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5월 정지작업을 시작한지 두 달만에 최초의 철거이주민 48세대 154명이 광주대단지로 들어왔다. 이후 서울시는 선 입주 후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3년 사이에 12만 명이 넘는 철거민들을 입주시켰다.
그들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어 배정 받은 택지에 말뚝만 박고 여전히 4~5가구씩 집단 천막생활을 해야 했다. 텐트 하나에 10가구 이상이 한꺼번에 사는 곳도 허다했다.

굶기를 밥먹듯…죽음은 일상

트럭에 실려 쏟아 부어진 사람들. 광주대단지는 그들이 살 곳이 아니었다. 도시 기반시설이 전혀 안된 허허벌판이었다. 서울에서 단순일용노동, 행상, 노점상 등의 형태로 하루 생계를 꾸리던 이주민들은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서울로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일거리가 없다보니 이들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져 굶는 날이 더 많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철거입주민들의 고용과 생계대책을 세우지 않고 버리다 시피 내버려두었다. 죽던 살던 그들의 몫이었다.

하루 5홉의 구호 양곡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지탱할 수 없었다. 구호 식량을 요청했으나 서울시는 어쩌다 소량의 밀가루 공급이 전부였다.위생시설도 엉망이었다. 공동변소가 부족해 아침마다 줄서기 경쟁을 해야했다.

판자로 드문 드문 붙여 안이 흔히 들여다보였다. 특히 볼일을 볼 때면 엉덩이가 보일 정도여서 아가씨 들은 이만 저만의 곤욕이 아니었다. 물이 없다보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눈만 뜨고 있다 뿐이지 산 사람이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1976년 봄에는 전염병이 번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심한 날에는 한 천막촌에서 3, 4구의 시체가 들려 나오기도 하였다. 장례 절차도 없었다. 죽기가 무섭게 그대로 갔다 묻었다. 죽는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큰 일도 아니었다. 그 가족들조차 삶에 지져 눈물을 흘릴 힘조차 없었다.

이러한 사정이 지속되자 민심도 흉흉했다. 10여 일을 굶은 부인이 출산을 하자마자 정신분열을 일으켜 죽은 갓난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한마디로 지금의 돼지 보다 더 못 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이들의 월수입은 1만원도 못됐으며 그 중 절반은 5천원도 안됐다. 1971년 현재 가구당 평균소득이 서울 4만4400원, 전 도시 3만7660원이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광주대단지 입주민들이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절반 가량은 입주권을 매각하고 서울로 되돌아와서 새로운 무허가건물을 지었다. 서울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주단지 내에 두 개의 소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하였지만 그것으로는 입주민들의 생계문제를 감당할 수 없었다.

팔고 떠나기 위한 입주증 전매행위가 공공연했다. 입주증 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고 투기꾼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속고 또 속다 결국 본노 폭발

서울시는 1970년 7월 11일 투기억제를 명분으로 광주분양지의 전매금지조치를 발표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수십 매의 입주증을 모았던 부동산 투기업자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이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까지 닥치는 데로 처분하는 바람에 거래가격도 폭락했다. 급기야 민심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서울시는 당시 광주지역 토지를 평당 230원대에 44만평을 일괄 매입한 뒤 철거입주민들에게 토지불하가격을 평당 8000-16000원으로 높게 책정했다.

분양지에 일정기간동안 건축행위를 못할 경우 분양권을 회수하고 30만원이하의 벌금을 물리기로 해 내 집 마련을 위해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참아온 주민들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경기도도 서울시가 토지매각업무를 개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옥취득세 고지서를 발부했다. 먹고살지도 못하는 철거민들에 대한 분양계약 요구와 가옥취득세는 일순간에 민심을 험악하게 돌려놓았다.

그때부터 이주민들은 '광주대단지토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조직적으로 맞섰다. 그리고 1971년 8월 10일 5만여 명의 철거민들은 분양가격 인하와 세금 면제 등을 요구하며 일어섰다. 이날은 양택식 서울시장이 광주대단지를 방문하게 되어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designtimesp=1459>라는 전단이 집집마다 뿌려졌다.

10시경에는 이미 3만여 시민이 성남출장소 뒷산을 온통 뒤덮고 출장소 마당을 비롯한 공지와 간선도로까지 인파로 메워졌다. "100원에 매수한 땅 만원이 웬말인냐." "배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등 플래카드가 물결을 이뤘다.

시민들의 가슴에는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반대 designtimesp=1461>란 리본까지 달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양택식 시장은 나타나지 않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시민들은"시장이 우리를 사람취급 안 한다"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성난 시민들은 성남출장소 입구 길에 세워둔 서울시 환지 과장의 지프를 개울바닥에 쳐 박았다. 곡괭이와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사업소에 몰려 간 시민들은 닥치는 대로 때려부쉈다. 사업소 직원 92명은 모두 달아났다. 광주경찰서기동경찰대 100여명과 광주단지내에 있는 성남소방지서 소방차 2대가 달려 왔지만 시민들의 분노에 밀려 접근도 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했고 주민 23명이 구속되었다. 일반인 시위로는 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광주대단지의 비참한 실상이 사회에 알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