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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입고 동네 우세… “어느 놈이 장가 오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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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1,483회 작성일 05-12-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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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입고 동네 우세… “어느 놈이 장가 오겠냐?”
미니스커트•비키니 입자 집에서는 ‘난리’



인간사회에서 유행에 가장 민감한 것은 옷이다. 우리나라 남성들의 옷차림의 일대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이 양복이었다면 여성들의 옷차림에 일대 변화를 일으킨 것은 미니스커트다. 한번 잘살아 보자며 경제개발의 구호가 전국에서 울리면서 핫바지를 입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960년대 간편한 옷의 실용성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다. 급속한 산업화는‘풍요의 시대’를 만들었다. 그 풍요의 혜택은 당장 여성들의 패션에서 나타났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니스커트나 핫팬츠 등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밖으로 표출하는 대담함이었다.

1960~70년대 초반 양복과 미니스커트는 수 천년 입어왔던 한복을 장롱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복은 농촌에서조차도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에 입는 나들이옷이 되어버렸다. 그 시절 우리 경제가 대 전환점을 맞으면서 서구 문화가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옷뿐만 아니라 두발, 손목시계, 밥 그릇 하나까지도 유행의 바람을 일으켰다. 오늘 귀한 물건도 며칠 안되어 대중화되었다. 누가 커피를 마시면 우르르 커피를 따라 마셨다. 찬물을 마시면 너도나도 따라 마셨다.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 사 동네방네 자랑하고 나면 사흘도 못 지나서 자기 것은 헌 것이 되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대도시의 거리에는 자고 나면 빌딩이 우뚝 섰고 여자들의 치마는 올라갔다고 한다. 넥타이를 맨 신사들도 흔하게 늘어갔다. 그러니 하루건너 양복점이 서고 의상실이 생겨났다. 그 지긋 지긋한 보릿고개를 벗어나면서 그 만큼 유행에 민감했던 시절이었다. 그 유행이 얼마나 민감했는가는 윤복희씨가 1967년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입은 미니스커트가 선풍을 일으켰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입은 짧은 치마는 TV를 지켜본 시청자들에게는 분명 충격이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엉덩이가 보일락 말락한 짧은 치마에 “저 여자가 제 정신이가?” 모두다 한마디씩 쏘아 붙였다. 한동안 어디를 가나 짧은 치마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화젯거리였다.

TV를 본 사람들의 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 미니스커트 바람은 대학의 캠퍼스를 휩쓸면서 순식간에 전국의 거리를 휩쓸었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짧은 치마 자락은 모든 여성들의 입맛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나이를 초월해 젊은이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에게까지 너도나도 한번 입고 나서니 미니스커트 열기는 뜨거웠다. 시골 노인들은 도회지에서 다니러온 젊은 여자들의 짧은 치마를 보고 눈을 어디로 둘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너무 망측해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쳤다. 그리고는 여자가 속옷을 입고 벌건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고 순 시상 놈이라며 돌아서서 욕을 끌어 붓다가 “세상이 말세라”고 긴 담뱃대로 화로를 두드리며 울분을 토해냈다.

엄격한 집안에서는 미니를 입으려는 딸과 그 것을 못 입게 단속하려는 아버지와의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짧은 치맛바람에 부부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어디 여자가 허연 다리를 내놓고 다니느냐며 간섭하는 남편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고리타분한 발상이라며 옥신각신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꼬리 타분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섰던 미니스커트는 분명 여성들이 우리 산업의 한축으로 우뚝 섰음을 보여주는 증명서이기도 했다. 그 시절 유행의 최첨단인 미니스커트는 1964년 프랑스 한 패션디자이너가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짧은 치마를 내놓으면서였다. 미니스커트는 출시하자 마자 단번에 젊은 여성들을 끌어들이면서 세계 여성들의 아름다움으로 통했다.

이웃나라인 영국은 불경기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에 한 디자이너가 내놓은 미니스커트가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면서 얼어붙었던 내수시장에 불을 지폈다. 그 미니스커트는 여성들의 아름다워 지려는 심리를 타고 전 세계에 미니 열풍을 몰아 치게 만든다. 쏟아지는 수출 물량을 맞추기 위하여 섰던 섬유 공장은 밤낮으로 돌려야 했다. 그 짧은 치마 바람은 전 산업으로 퍼져 긴 불황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다. 실업자가 넘쳐나던 거리에는 작업복을 입은 젋은이들로 가득찼다. 파리를 날리든 음식점과 술집도 매출이 껑충 뛰었다.영국정부는 경기가 회복되자 그 공로를 인정해 미니스커트 디자이너에게 훈장까지 줬다.

이처럼 여성들이 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짧은 치마로 인한 신체적 노출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는 비키니 수영복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50년대 후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도 수영복 심사가 있었다. 그 당시는 유흥업소 종업원들이나 신여성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입었다고 한다. 그 후 1961년에 한 기업에 의해 수영복이 대량 생산, 수영복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초창기 비키니 수영복은 그 수용과정에서 많은 웃음거리를 남겼다.

창원에서 사업을 하는 김권만(56)씨는 외국 모델이 그려진 비키니 달력 때문에 아버지께 혼이 났다고 한다. 당시 시골에는 달력이 귀했다.
새해가 되면 국회의원들이나 국회의원 출마 예정자들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하여 한 장에 12개월이 다 있는 달력을 돌렸다. 그 달력에는 자신의 약력을 빼곡이 넣고 자신의 얼굴 사진을 커다랗게 넣었다. 달력이 엄청나게 귀한 시절이다 보니 집집마다 큰방의 벽 중앙에 꼭꼭 붙여놓고 찢어지지 않게 신처럼 모셨다. 그러니 홍보도 100점이었다.
자신이 부산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비키니 달력을 가져와 자신의 방에 숨겨 놓고 아버지 몰래 돌려보았다. 친구들이 보고 좋은 그림 있다고 소문을 내는 바람에 온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구경을 하겠다고 들이닥쳤다. 친구들은 밤마다 자신의 방에 모여들어 달력을 넘기면 히죽거렸다.

동네 조무래기들도 달력을 보여 달라고 삽짝 문 앞에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아들은 보면 안 된다”고 쫓아 버렸다. 그러면 어느새 다시 우르르 몰려들었다. 동네여자들은 벌거벗은 모델의 달력을 보겠다고 곁눈질에 바쁘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은 “다 큰 가시나가 벌거벗고 아무짝에도 못쓰겠다”고 욕이 만 바가지다. 마침 들일을 하고 돌아오던 아버지가 보고는 “이놈의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못된 것만 배웠다”고 버럭 화를 냈다. “네놈이 동네 버리겠다”고 말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궁이에 집어 넣어버렸다. 불에 사라져버린 비키니 달력이 너무 아까워 한동안 눈에 빙글 빙글 돌았다. 자신의 친구들도 섭섭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마산에 사는 김순영(64)씨는 자신이 처녀 때 고종 사촌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참가해 친지들이 응원을 갔다고 한다. 고모부도 자신의 딸이 나오자 처음에는 주위를 돌아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연방 입이 싱글벙글 했다. 문제는 수영복 심사였다. 시집도 안간 처녀들이 허벅지를 내놓고 나오자 노인들은 “오래 살다가 보니 우스운 꼴을 다 보겠다”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또 “동방예의지국에 어찌 저런 일이”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와 반대로 총각들은 뜻하지 않은 횡재에 입을 헤벌레 하게 벌리고 한번이라도 더 보겠다고 눈이 빠졌다. 여자들은 괜히 민망한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앉은 고모부는 얼굴이 연방 붉으락푸르락 했다. 그리고는 고모를 향해 죽일 듯이 째려보다가 집으로 팽하니 가버렸다. 집에 온 고모부는 “대한민국 우세를 했다”며 난리를 피웠다. “저 다 큰 가시나가 옷을 반쯤 벗고 허벅지를 내놨으니 어느 놈이 장가를 오겠냐”며 “시집은 다 보냈다”며 끙끙 앓았다. 옆에 앉은 고모를 향해 딸 단속 잘 못했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쏘아붙인다. 고모는 죽을 죄인이 되어 “낸들 속옷을 입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우리집 망했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고모부는 미인대회에 나간다고 온 동네 자랑해 놓고이게 무슨 개망신이냐며 한동안 대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미인대회 말만 꺼내도 혹시 자신의 딸이 미인대회서 허벅지를 내놓고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을 봐을까봐 기가 죽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지금도 비키니만 보면 그 순간이 떠오른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오히려 구식이라고 자신의 고모부가 신문에 날 일이지만 가정의 윤리가 엄격했던 당시로서는 세상에 쏟아지는 눈빛을 한 가정이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1946년 전만 해도 서구에서는 수영복이라 할지라도 다리를 완전히 가리는 긴 치마였다. 다리를 드러내는 것을 아주 부도덕한 것으로 여겼다. 그 속에서 충격적인 것은 1946년 그 해 프랑스 한 디자이너가 옷을 입은 역사 이래 대변화인 비키니 수영복을 개발해 여성들의 신체를 과감히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비키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그 해 7월 미국이 비키니 산호초로 부르는 마샬제도 해역에서 원폭 핵실험을 하자 전세계의 신문과 방송은 핵실험 기사뿐이었다. 비키니라는 말이 지겹도록 나왔다. 자신이 만든 수영복에 멋진 이름을 찾고 있던 디자이너는 그래 이것이다 무릎을 닥치고는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충격도 잠시 그 보다 더한 충격은 영국에서 있었다. 한 자동차 정비 기술자가 만든 수영복이었다. 수영복대회에 모델이 입고 나온 것은 손바닥만한 헝겊 조각으로 가슴과 주요 부분만 가린 것이었다. 배꼽을 훤히 드러낸데다 가린 아랫도리도 너무 아슬아슬 했다.

모델들의 차림에 웃고 떠들던 수만 명의 관중들이 너나 없이 나타난 해괴한 몰골에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숨을 죽였다. 잠시 동안의 충격에서 깨어난 관중들은 넉이 빠졌다. 서로 보겠다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서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신문도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그 충격적인 여파는 유럽전체를 들끓게 만들었다. 특히 종교단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비키니를 입는 것을 금했다. 일반인들도 밤무대에 서는 무희 들의 옷이라고 기피해 대중화되지 못했다. 정비기술자는 수영복을 만들어 놓고 모델을 못 구해 애를 태웠다. 모두다 해괴한 옷을 보고는 저질 인간이라고 뒤도 안보고 나가 버렸다. 어떤 모델은 한번 입어보고는 기겁을 하며 당장 옷을 벗어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당신이나 많이 입고 나가라며 코방귀를 뀌었다.

대회 날짜는 눈앞인데 조바심이 난 디자이너는 카바레 스트립 댄서를 찾아갔다. 그 댄서도 해괴망측한 수영복을 입어보고는 고개부터 흔들었다. 통 사정을 해 간신히 무대에 세웠다. 예상을 깨고 무대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 댄서는 인기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