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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급 승용차 못지 않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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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1,796회 작성일 05-12-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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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급 승용차 못지 않던 ‘자전거’
부잣집 아이들 통학수단으로 ‘부러움의 대상’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자전거는 큰 부잣집을 제외하고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많아야 한 동네 한두 대였다. 한 대도 없는 동네도 많았다.
학교에서 가정 환경조사를 할 때도 자전거 있는 사람 손을 들라고 할 정도로 당시 자전거는 부의 상징이자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자전거가 있다고 손을 든 아이를 향해 백여 개의 시선이 집중되던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

자전거는 지금의 웬만한 승용차 못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전거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자전거는 20여 마지기 논을 부치는 대농도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부잣집도 대부분 읍내 공부하는 아들의 통학용으로 어렵게 구입했다. 이처럼 흔하지 않은 물건이라 농촌의 아이들에게 자전거하면 퍼뜩 떠오르는 것은 막걸리 통을 가득 실은 바퀴가 큼직하고 무식하게 생긴 자전거와 우체부 아저씨가 타고 다니는 빨간 자전거였다.

초등학교 길에서 한아름 되는 막걸리 통 대여섯 개를 자전거에 싣고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막걸리를 배달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막걸리를 실은 자전거가 오르막을 오를 때 힘겨워하면 학교 가는 길의 꼬마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밀기도 했다. 그 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그 시절 자전거는 눈을 닦고 봐도 찾아보기 힘들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자전거는 아주 긴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동네에 한 두 대 있는 자전거는 온 동네 사람들이 이용했다. 갑자기 배탈이 나 약을 사러 읍내에 갈 때도 자전거였다. 마을에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 지서에 신고하러 갈 때도 자전거였다. 이웃집에 초상이 나도 그 자전거는 읍내로 황급히 달려가 전보를 쳤다. 옆집 누님이 시집가는 청첩장을 돌릴 때도 자전거였다. 이처럼 자전거는 한때 마을의 슬픔과 즐거움을 모두 싣고 달렸다.

한나절이 넘게 걸리던 읍내 길도 한시간이면 거뜬히 일을 볼 수 있었으니 당시 농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이었다. 길이 좁아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곳이라면 자전거는 신속하게 다닐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마을 중대사는 자전거를 빼놓고는 의논이 불가능했다. 열 사람이 알려야 하는 일을 자전거 한 대면 거뜬하게 처리할 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자전거의 편리함에 매료되어 자전거 한 대쯤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열심히 일해 자전거를 가지게 되면 너무 좋아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몸은 부서져도 자전거만 부서지지 않으면 됐다. 박이 터져도 자전거만 괜찮으면 그만이었다.

부잣집 아이들 통학수단으로 ‘부러움의 대상’

그 애지중지 하던 자전거가 긁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너무 너무 속이 상했다. 보고 또 쳐다보고 그 흠집을 없애기 위여 기름걸레로 닦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 밤에는 혹시나 손을 탈까봐 깊은 창고에 넣어 자물쇠를 겹겹이 잠갔다. 어떤 사람은 그것도 못미더워 아예 안방에 넣어 머리맡에 두고 잤다. 그 귀한 자전거였지만 동네의 중대사가 발생할 때마다 기꺼이 빌려 주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자전거가 눈에 빙글빙글 돌았다. 그 놈의 밤은 왜 그리 긴지 하룻밤이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길었다. 날이 희미하게 밝기가 무섭게 창고에 달려가 자식 쓰다듬듯이 자전거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체인과 기어에 기름이 줄줄 흘러내리도록 기름을 치고 또 쳤다.

햇살이 퍼지면 자식를 앞뒤로 태우고 하루 종일 동네 위에서 아래로 빙빙 돌며 자랑을 했다. 아무리 타도 또 타고 싶었다. 동네 꼬마들도 덩달아 자전거 뒤를 몰려다니며 신이 났다. 할 일없이 읍내에도 자전거를 타고 들락거렸다. 읍내 초원다방의 미스 김도 평소답지 않다. 평소에는 말을 걸면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감히… 누구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거냐”며 들은 척도 않고 코방귀만 날렸다. 커피를 시켜도 촌놈 라고 무시하며 커피잔만 달랑 놓고 눈길도 한번 안주고 가버린다. 네 놈이 돈이 있어봤자 보리쌀 판 노랑돈 몇 푼이지 그 돈 가지고 이양•김양 하며 껄떡거리지 말라는 투였다.

큰 마음 먹고 김양 커피 한잔하지 하면 말도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리쌀 판 그 커피 마시고 10년은 다리 뻗고 못 잔다며 “그 돈 있으면 집에 가서 사모님이나 많이 사주셔” 톡 쏘아 버린다. 그리고는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느끼한 돼지 같은 놈의 옆에 다리를 비비꼬고 앉자 연방 사장님, 사장님하며 혀끝이 살살 녹는다. 그리고는 알밤이 들어갈 정도로 넓적하고 치켜든 볼품 없는 콧구멍을 보고도 잘생겼다. 도다리 같이 흐리멍텅한 눈도 잘생겼다. 곧 터질 것만 같은 남산만한 배도 아래위로 슬슬 문지르며 멋지다며 양껏 비행기를 태운다. 그 말에 돼지 같은 놈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비실비실 거리며 터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저 돼지 같은 놈 뭐가 좋다고 쳐다보고 있자니 천불이 난다.

평소에는 푸대접도 그런 푸대접이 없었는데 오늘은 다방입구에 들고 들어와 세워둔 자전거 탓일까 초원다방의 김양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저 꺼주꾸리한 양반이 돈이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 이때까지 사람을 몰라보고 타박을 준 것이 후회가 막심했다. 항상 방정맞은 이 입이 탈이라며 자신의 입을 이리저리 쥐어뜯었다. 커피잔을 놓고 달아나기 바빴던 김양이 오늘은 제법 엉덩이를 흔들며 아양을 떤다. 그리고는 사장님 했다가 아저씨 했다가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팔짱을 끼며 옆에 착 달라붙어 앉는다. 뜻하지 않게 호박이 넝굴째로 굴러들어 오자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기다가 사장님 소리까지 들었으니 생신지 꿈인지 몰라 “나도 쨍하고 해뜰 날 있다”며 혼자 중얼거린다. “이 아가씨가 오늘 아침을 잘못 먹었나.”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지다니 평소에 괄시하던 초원다방의 김양이 영 딴사람이었다. 언제는 커피를 사주겠다고 해도 입을 삐죽거리며 “니 커피를 먹니 벼룩의 간을 빼먹지”하며 사람취급도 하지 않더니만 오늘은 커피가 달다며 간지럼을 피웠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지체 높은 면장님도 우체국장도 아는 체 한다. 약방 주인도 식당 사장도 인사가 극진하다. 자전거 덕분에 졸지에 마을의 유지가 되었다. 자전거 한 대에 세상이 달라졌던 그처럼 어려웠던 시절도 70년대 새마을 노래 소리를 타고 삶이 한결 나아졌다. 농촌은 초가지붕이 뜯겨나가고 돌담은 벽돌로 교체되고 골목길도 넓혀졌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돈벌러 가는 대신에 책가방을 들고 중학교로 갔다. 그 이전에는 먹고살려고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거의가 보따리만 하나 달랑 둘러메고 무작정 돈벌러 도시로 떠난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그 중학교 길은 초등학교 보다 더 멀었다. 면 단위마다 학교가 있다보니 보통 시오리•이십리 길이었다. 2시간 정도 걸리는 그 먼 학교 길을 걸어서 간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먼 곳은 아침 6시 반이면 떨어지지 않은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서야 학교에 지각을 하지 않고 도착을 할 수 있었다. 하루 일곱시간 시간표를 챙기다 보면 가방도 한 짐이었다. 거기에다 체육이 든 날에는 체육복까지 넣다보면 가방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3년을 오르내린다는 것은 정말로 끔찍했다. 여름에는 통학길이 한결 수월했지만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학교길이 죽음의 길이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중학교에 갓 입학을 하면 빚을 내서라도 자전거를 사는 것은 필수였다. 그 귀한 자전거도 중학생이 많아지면서 웬만한 가정에는 한 대 정도는 있게 된다. 70년대 들어 중학생이 늘어나면서 자전거는 완전히 대중화된다. 자전거는 시골 중학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골 중학생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아이에게는 보물보다도 더 소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년 간 타고 다녀야 하는 자신의 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사는 그 날부터 기름걸레로 닦고 닦아 광이 번쩍 번쩍 났다. 학교에 갔다오면 자전거를 닦는 것이 일이었다. 앞 뒤 바퀴 살 하나 하나까지 기름을 먹인 걸레로 닦았다.

자전거 뒷바퀴 위에 설치된 짐대에 고무밧줄로 가방을 동여매 돌밭길을 달리다 보니 자전거는 사흘이 멀다하고 부서졌다. 타이어 펑크가 안 나면 체인이 끊어지고 또 호크가 부러졌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자전거에 고장수리에도 반 도사가 되었다. 펑크 정도는 자전거 수리점에 가지 않고 아이들이 직접 해결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온 사람 앞에 자전거 타는 솜씨를 자랑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자전거를 능숙하게 탔고 자전거에 대해서는 박사였다. 지금은 멀쩡한 자전거도 고물상으로 가기 바쁘지만 그 시절에는 자전거 한 대가 없어 가슴 아린 사람이 수없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