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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딱지…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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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1,927회 작성일 05-12-0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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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딱지…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보물’
PC게임에 묻혀버린 아련한 ‘우리들의 놀이’



귀마개, 검정 고무신, 새총, 썰매, 팽이들은 기성세대에게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추억의 단어들이다. 지금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주위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 시절에는 더 없이 소중한 물건이었다. 60~70년대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놀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아이들에겐 하루해가 짧기만 했다. 개울이나 골목길•양지바른 언덕 밑 등 아이들이 앉는 곳이 놀이터였다. 놀이기구도 따로 없었다.

막대기가 잡히면 막대기로, 돌이 잡히면 돌로, 흙이 잡히면 흙을 가지고 놀았다. 개울의 꽁꽁 얼어붙은 얼음도 더 없는 놀이터였다. 논두렁에 삶의 보금자리를 튼 땅벌집도 아이들에겐 신나는 놀잇감이었다. 심심하면 돌을 툭 던지고 짚단에 불을 붙여 벌집 입구에 들이밀었다.
그러다가 땅벌에 쫓겨 정신 없이 달아나기도 했다. 또 땅벌에 쏘여 이마에 혹을 달기도 했다. 돈을 들이지 않았지만 돈을 들여야 놀 수 있는 지금보다 훨씬 재미가 있었다. 비록 손발은 터 쩍쩍 갈라졌지만 말이다.

겨울이 되면 남자아이들은 자치기, 깡통차기, 팽이치기, 딱지치기 등이 주 놀이였다. 그 놀잇감도 쓰고 버린 것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했다. 당시 아이들의 놀이는 보통 4~5명이 한 팀을 이뤄 편을 갈라 하는 놀이가 대부분이었다. 거기에는 이기고 지고 하는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다 한마음으로 뭉치는 단합된 힘이 중요했다. 놀이 자체도 한 사람이 뛰어난 것보다도 단결과 협동해야만이 이길 수 있었다. 또 놀이를 통하여 아량을 베풀고 남을 배려하는 인간미도 키웠다.

자신이 가지고 놀 놀잇감은 자신이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했다. 만든 장난감에 동강난 크레용으로 그림도 알록달록하게 그려 넣었다.
그러다보니 개성에 따라 생김새도 각양각색이었다. 꼭 필요에 의해서 놀잇감을 만들다 보니 창의력도 한껏 향상되었다. 또 자신이 직접 만든 물건인 만큼 그 소중함도 남달랐다. 그 신났던 놀이도 어느 날 자고 나보니 꼬리를 감추고 없었다. 레고, 모형자동차, 장난감 총, 로봇 등 완구들이 안방으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열광적인 컴퓨터 게임에 반짝 하다가 지고 말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외에는 놀이가 없다. 하루종일 어두컴컴한 PC방에서 때리고 쏘고 죽이고 부수고 거기에 혼자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 광분한다. 그 속에 아이들의 정서가 온전할 리 없다. 컴퓨터 게임은 한마디로 수천 년 대대로 전해오던 아이들의 놀이세계에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게 만들었다. 지금 농촌에도 그 시절 놀이를 눈을 닦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 부모들의 지나친 공부바람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모두다 도시로 떠나고 그 놀이를 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마을 골목이나 빙판 위에서 치던 팽이와 설매, 깡통을 차고 우르르 달아나던 아이, 흙 때가 묻어 덕지덕지한 딱지를 보물처럼 움켜쥐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만족해하는 아이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양지에서 자란 꼬이고 꼬인 소나무를 베어와 팽이를 만들었다. 팽이는 낫과 톱 정도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베어온 나무를 축담이나 높은 곳에 걸쳐놓고 앞으로 끌려나가지 않게 한 사람이 밟고 서 있고 한 사람은 낫으로 돌려가며 밑 부분을 둥그스름 하고 뾰족하게 깎았다. 밑 부분을 원뿔 모양으로 만들어 톱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르면 멋있는 팽이가 되었다. 팽이는 잘 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친구의 팽이와 싸움을 붙여 이기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자 당시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팽이가 잘 돌고 싸움을 잘하게 만들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우선 팽이가 싸움을 잘 하려면 나무가 단단해야 했고 무거워야 했다. 아이들은 팽이를 무겁게 하기 위하여 만들자 마자 오줌통에 한 사흘 담가 두거나 쇠죽을 끓이는 솥에 넣어 푹 삶았다. 그것은 싸움을 잘 하라는 목적도 있지만 팽이 재료가 나무이기 때문에 애써 만든 팽이가 말라 쪼그라 드는 것을 방지하고 금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 사흘 오줌통이나 쇠죽솥에 삶겨 나온 팽이는 말 그대로 묵직해 돌리면 ‘윙 윙’ 소리를 낼 정도로 천하 무적이었다.

아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팽이가 힘이 세고 잘 돌아가도록 팽이 밑에는 못 쓰는 베어링을 분해해 빼낸 쇠구슬을 박았다. 그리고 팽이 위에는 동그란 베어링을 둘렀다. 쇠구슬과 베어링을 입은 팽이는 당연히 싸움만 하면 1등이었다. 웬만한 팽이는 살짝 부딪혀도 저 만치 튕겨 나가 꼬꾸라져 버렸다. 진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해 씩씩거렸다. 그러다 보니 당시 아이들은 흔치 않은 베어링과 쇠구슬을 구하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설쳤다. 방앗간 연장통이나 농기계 수리점 주변을 수시로 살피다가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슬쩍 하기도 했다.

또 팽이를 잘 돌게 하기 위해서는 팽이채가 중요했다. 팽이채는 40㎝ 정도의 나무 막대기에 헝겊으로 만든 노끈을 맸다. 노끈을 물에 적셔 팽이를 향해 채찍처럼 휘두르면 ‘딱’ ‘딱’소리를 내며 신나게 돌았다.그렇지만 헝겊으로 만든 팽이채는 잘 떨어지는 것이 흠이었다. 팽이채는 닥나무 껍질이 제격이었다. 닥나무 껍질은 잘 떨어지지 않는데다 팽이를 치면 칠수록 부드러웠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 팽이채로는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팽이도 헝겊으로 만든 채보다 더 세게 돌았다.

팽이는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닥나무는 아무 곳에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마을의 양지바른 밭 언덕에 주로 군락을 이뤄 자랐는데 까다로운 생존 특성 때문인지 그것도 없는 마을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닥나무껍질을 구하기 위하여 온 산을 뒤졌다.
그 애환의 팽이도 집집마다 한 두개 정도는 이 방 저 방에 굴러다녔는데 이제는 ‘플라스틱 문화’가 생활의 주요 수단이 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마산에 사는 박명권(47)씨는 어릴적 자치기를 하다가 ‘토끼’가 날아가 김칫독을 맞히는 바람에 장독이 박살 나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두다 하던 놀이를 그만 두고 줄행랑을 쳤다. 귀한 독을 깼으니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께 혼이 날까봐 하루종일 오들오들 떨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도 김칫독을 보면 30여년 전 그 시절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창원에서 노래방을 하고 있는 김춘영(48)씨는 초등학교 시절 겨울방학이 되면 딱지치기에 목을 맸다고 한다. 당시의 딱지는 지금처럼 돈을 주고 산 천연색이 아니고 다 쓴 공책이나 교과서, 종이 포대 등을 찢어서 만들었다.

마분지나 딱딱한 종이는 무거워서 쉽게 넘어 가지 않기 때문에 딱지 종이로 대 인기였다. 두꺼운 종이로 만든 딱지 하나만 있으면 온 동네 아이들의 딱지를 다 끌어 모았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딱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김씨는 또래 친구들과 딱지 따먹기를 하면 자신은 언제나 잃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는 종이는 거덜이 나버렸다.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누나가 학교에서 배우는 책이었다. 그 책을 몰래 가지고 와 딱지를 만들어버렸다.

당시 자신의 집은 생활이 어려워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누나의 교과서는 동네의 형님과 누나들이 쓴 헌책을 받아 사용했다. 그 귀중한 책을 딱지를 만들어 버렸으니 어머니께 혼이 날 것은 당연했다. 찢어진 책을 보고 어머니는 닭똥 같은 눈물부터 흘렸다. 그 책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간신히 구했는데 다시 책을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새책을 사 줄 형편도 되지 못했다. 누나는 책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 죄로 어머니께 대나무 회초리로 종아리가 터지도록 맞았다고 한다. 자신의 철없던 시절의 잘못으로 책 없이 공부한 누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지금이야 지천으로 깔린 것이 종이지만 그 시절은 종이 한 장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딱지도 아이들에게는 보물인 것만은 분명했다.

김해에 사는 김권길(49)씨는 팽이에 박을 욕심으로 소 구루마에 쓰일 베어링을 훔쳤다가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 소 구루마로 짐을 실어다 날라주고 운임을 받아서 먹고사는데 베어링을 잃어 버렸으니 구루마를 움직일 수 없었다. 구루마 주인은 잡히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온 동네를 수소문하며 뒤졌다. 이미 베어링은 또래 친구들과 쇠망치로 부숴 나누어 가진 뒤였다. 구루마 주인 얼굴만 쳐다봐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간이 콩알만해졌다. 구루마 주인은 베어링을 못 찾으면 당장 며칠을 놀아야 할 판이고 다시 베어링을 사러 읍내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새파랗게 뛰며 설쳤다.

금방 잘 있었던 베어링이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안절부절못하며 다급하게 찾았다. 지금도 팽이만 보면 그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 온다고 한다. 그 어려운 시절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의 일을 망쳐 놓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