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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움 실은 비행기 뜨면 하늘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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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1,685회 작성일 05-12-0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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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움 실은 비행기 뜨면 하늘도 울었다
가난했기에 외국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난다고 했던가. 어느 시대든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별의 슬픔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하루하루 삶 자체가 이별의 연속이다. 1903년 102명이 가난한 조국을 등지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미국 증기선을 탔던 그 이별도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이역만리 낯선 타국으로 떠나가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헤어지기 섭섭해 항구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살아 생전에는 다시 자식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그대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버렸다. 뚜~뚜~뚜 뱃고동 소리는 긴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 가자 하늘도 울고 항구도 울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총알받이로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바다를 건너 사선으로 끌려갔다. 해방이 된지 50 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한국전쟁 때는 수 백만 명이 북에서 남으로 피란을 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향의 슬픔을 달래고 있다.

이별의 장소도 일제강점기 때는 항구에서, 한국전쟁 때는 기적소리가 울리는 역에서 그들은 그렇게 긴 이별을 했다. 60~70년대는 먹고살기 위해 돈벌러 타국행 비행기를 탔다. 많은 가족들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이처럼 이별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슬픔이 더하기도 덜하기도 했다. 특히 우리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과 가난으로 뼈아픈 이별이 많았다. 그 이별의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60~70년대 우리는 정말 가난했다. 외국으로 가려고 해도 비행기가 없었다. 설사 비행기가 있어도 타고 갈 사람이 없었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서독으로 가는 광부와 간호원 그리고 월남전 참전용사,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 떠나는 농업 이민이 대부분이었다. 70년대는 중동으로 나가는 근로자들이 주류였다. 그 외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관료나 기업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와 공항은 일반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국제선도 1주일에 2~3편 뿐이어서 비행기를 놓치면 보통 1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가난했기에 떠난 사람들

71년 4월에 화물기가 미주노선으로 취항했지만 첫 취항부터 싣고 갈 화물이 없어 대한항공 전 직원들이 나섰다. 당시 우리의 주요 수출품은 가발이었는데 직원들이 전국곳곳의 가발공장을 찾아다니며 화물기에 실을 물량을 모았다고 한다. 그 시절 우리의 날개는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가운데 꼴찌였다. 보유 항공기는 8대로 대부분 수명이 다한 것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한항공은 120여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30개국 80여개의 도시에 취항하고 있다. 한마디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셈이다.

1972년 4월 중순 태극마크를 달고 미주노선에 첫 취항한 보잉 707제트기가 기착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자 교민들은 선명하게 그려진 우리의 태극기를 보고 감격이 복받쳐 올라 목놓아 울었다.
가난을 못 이겨 수 만리 바닷길을 건너온 그들은 수 십년 만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조국의 국적기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서로 부둥켜 안고 펄쩍 펄쩍 뛰었다. 그동안 가난한 조국 때문에 받은 서러움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최종 목적지인 LA에 도착했을 때는 수천 명의 교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하와이에 이어 또 한번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교민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빨강과 파랑이 선명한 태극기가 그려진 조국의 여객기를 바라보며 연방 눈물을 훔쳤다. 이제 우리의 조국도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모두다 애국가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교민도, 비행기에 탔던 승객과 승무원도 모두다 진한 눈물을 흘린 감격의 순간이었다. “힘든 타국생활이지만 더 열심히 일해 한번 잘살아 보자” “세계제일의 조국을 만들자”며 서로 손이 닳도록 맞잡았다. 잘 사는 나라들이야 흔한 게 국적기라 무슨 감격이 있겠냐마는 우리에게는 태극마크를 단 국적기 한 대에 목이 메도록 감격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꿈과 새로운 희망이었다. 교민들에게 조국하면 전쟁과 헐벗고 굶주린 나라. 그 굶주림에 몸서리 쳤지만 국제무대에 우뚝 선 조국의 국력신장에 교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당당해졌다.

천근 같은 발걸음 떼고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며 가슴 저리는 사람이 많다. 그 시절 공항에서는 애틋한 장면이 매일 매일 이어졌다. 서독에 광부로 가는 아들을 붙잡고 환갑을 훨씬 넘긴 어머니는 “우야든가 몸조심해라” “어머니 걱정 마이소…몸 건강하게 오래 살라”며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 어머니는 자식이 탄 비행기가 눈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없는 집에 태어나서 죽을 고생을 하는 구나” “그 놈의 돈이 뭔데 이역 만리까지 가야 하나”며 비행기가 사라져간 하늘 저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해 온기마저 식어버린 하늘을 보고 또 쳐다보았다.

저쪽에서도 정신 없이 출국 수속을 끝낸 젊은이가 아내의 손을 꼭 잡고서 긴 침묵만이 흘렀다. 어디를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기며 탑승구 앞에 섰다. 아내와 자식를 두고 떠나려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 질 듯 하다. 아내가 건네주는 가방을 넘겨받으며 “이제는 긴 이별이다.” 가슴으로 전해오는 짜릿한 전율이 온 몸으로 흘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집 걱정말고 부디 몸 건강하게 잘 다녀 오이소” “당신께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떠나 미안하다. 어머니 아버지 잘 모셔달라”며 말을 채 끝맺지 못한다.

갈 길이 바쁘다며 얄미운 문은 입을 떡 벌리고 섰다. 무거운 발걸음을 들어 문턱을 넘는다. 뒤돌아보니 벌써 아내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냥 돌아서 가라며 손짓을 해도 아내는 잘 다녀오라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가면 한참 후에야 온다. 열심히 돈 벌어 남부럽지 않게 살리라 수 천 번 다짐을 하며 그들은 그렇게 낯선 세계로 떠나갔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서야 그제야 이별을 실감한 아내는 공항대합실의 벽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한다. 당시 공항에는 지긋 지긋한 가난의 멍에를 벗고자 떠나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였다 보니 이별도 애틋했다. 그 공항 대합실은 눈물로 날이 새고 눈물로 날이 졌다.

창원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는 김순은(51•여)씨는 공항하면 가슴 저미는 애틋한 이별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문주란씨 노래인 <공항의 이별>을 지금도 즐겨 부른다고 한다. 그 노래는 자신의 감정을 너무 너무 잘 담아 냈다고 한다.

영영 오지 않은 연인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한마디 말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을 /이제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구름 저 멀리 사라져간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 /허전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달랠 길 없어 나는 울었네/로 끝나는 이 노랫말은 70년대 초반 우리의 시대 상황과 맞물리면서 일약 인기가요로 부상했다.

당시 서독 광부로 간호사로, 남미로 이민 가는 사람들의 공항 이별의 애틋한 심정을 절절이 담아냈다. 특히 이 노래는 이역만리 돈벌러 간 남편과 연인을 생각하며 눈물지었던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식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비행기만 날아가도 멍하니 서서 정신 없이 바라보며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김씨도 이 노래만 들으면 30여년 전 유학을 간 연인 생각이 절로 난다고 한다. 김포공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헤어졌던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로 돈 벌러 나와 알게 되었는데 자신보다는 다섯 살 정도 많았다. 서로가 외로운 처지라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면 매일 만났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하기로 약속을 했다. 열심히 벌어서 야간 대학의 등록금도 보탰다. 대학을 졸업한 그 사람은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김포공항에서 2년 후를 기약하며 눈물로 떠나보냈다. 처음에는 열흘이 멀다하고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편지도 뜸하더니만 어느 날 편지가 뚝 끊어져 버렸다. 오늘은 편지가 오려나 하루하루 우체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기다림으로 끝났다. 유학을 마치고 들어와 잘살고 있다는 소식은 먼 발치에서 들었건만 세월이 약이라고 지금은 배신감도 없다.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공항의 이별>을 부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수많은 사연들이 메아리쳐도 /지금은 말못하고 떠나가는 당신을 /이제와서 뉘우쳐도 허무한 일인데 /하늘 저 멀리 떠나버린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 목이 터져라 불러도 곧 허공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 시절 그 사람은 가슴속에서 잊혀 졌지만 하늘 저 멀리 사라져간 그 비행기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지었던 그 순간이 지금도 가슴에 선하다고 한다. 먹고살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떠났던 그 시절 이별도 애틋했다. 그러나 지금의 공항에는 그 애틋하고 가슴 저미는 이별은 없다. 살기가 나아진 탓일까…. 그 시절 공항의 가로등은 유난히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