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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에 무슨 얼어죽을 선글라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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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1,491회 작성일 05-12-0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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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에 무슨 얼어죽을 선글라스냐"
돈 벌어 도회지 갔다 고향 올때 온갖 폼 다잡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바깥세상 구경을 한번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태반이었던 첩첩 산골. 그 산골에도 바깥바람이 살랑 살랑 들락거린다. 그 바람은 농촌을 수 천년 묵은 오랜 잠에서 깨우면서 생활과 문화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그 거센 바람의 진원지는 60년대 초반 보릿고개를 견디다 못해 무작정 도회지로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에 다니러 오면서였다. 그들은 물 설고 낯 선 곳에 홀로 내던져졌지만 잘 살아 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억척같이 돈을 모았다. 막노동으로 전전한 고된 타향살이였지만 먹을 것이 없어 배 곯았던 지긋지긋한 지난 생활을 생각하며 자다가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 부자가 씨가 있으랴….” 그러면서 그들은 돈 벌기 전에는 고향을 가지 않으리라 수천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다.

나물죽도 한 그릇 배부르게 먹지 못한 비참함을 겪은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만 있으면 좋았다. 연일 반복되는 중노동으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쉬는 날은 없었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면 문을 박차고 일어났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항상 일찍 출근했고 늦게 돌아왔다. 처음에는 동료들조차 저 촌놈이라며 무시하고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걸었다. 괜히 트집도 잡았다. 사람이 질렸지만 세월이 약이라며 꾹 참았다. 그저 말 없이 일만 하는 성실함에 주위의 시선도 달라졌다. 회사에서도 공사판에서도 그들은 가장 부지런한 사람으로 손 꼽혔다. 그 삶의 터전을 잡는데 후딱 2~3년이 흘러버렸다.

그동안 먹고살기가 다급해 부모님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오직 돈, 돈, 돈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고생한 대가로 밥숟가락이라도 들 형편이 되다보니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도회지로 떠난지 수년만에 고향을 찾게 된다. 그 늦은 귀향은 고향산천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은 큰 마음 먹고 몇 달 월급을 들여서 라디오도 사고 재봉틀도 사 부모님께 선물로 가져왔다.

60년대 중반 라디오와 재봉틀은 시골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 재봉틀은 옷을 밤새도록 일일이 바늘로 기워서 입었던 시절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떨어진 옷을 단숨에 박아 버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 신기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재봉틀은 긴긴 겨울밤 가물가물한 호롱불에 머리를 갖다댔지만 골무를 낀 손가락을 여지없이 찔렀던 어머니의 일거리를 일거에 빼앗아 가버렸다. 너도나도 떨어진 옷을 깁겠다고 온 동네 옷을 가져오는 바람에 재봉틀이 있는 집은 문지방에 불이 났다. 그 재봉틀은 순식간에 동네의 큰 일꾼이 되었다. 집집마다 재봉틀을 하나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금성사에서 나온 라디오였다. 베개 만한 네모 상자에서 잘잘잘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그 라디오 소리를 듣겠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치 들일을 마치고 나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세월에 무감각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만이 빈집을 지키며 호롱불에 긴 담뱃대를 댔다 뗐다 하며 뻐끔 거릴 뿐 마을은 집집마다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마당에는 멍석을 몇 개나 폈지만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앉았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특히 매 시간마다 방송하는 뉴스는 산골마을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가 동네에 없을 때는 5일마다 돌아오는 장에서 바깥소식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내일은 비가 온다 안 온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었다, 서울에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등 시간마다 전하는 뉴스를 듣고 전국의 소식도 알 수 있었다. 배호, 이미자 노래도 단번에 라디오를 타고 산골 마을까지 퍼져 농촌의 처녀 총각들이 따라 불렀다. 라디오의 등장으로 동네 유지의 개념도 바뀌었다. 전에는 글깨나 하는 어른이 신문 쪼가리라도 주워보고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정치에서부터 경제까지 해박해 누구하나 끽 소리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놈 라디오 때문에 말발도 서지 않았다. 정치 이야기만 꺼내면 이놈도 들고 나오고 저놈도 들고 나오고 전부다 박사다.

이처럼 돈 벌러 도회지로 갔다가 몇 년만에 해보는 시골 나들이는 농촌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라디오와 재봉틀의 신기함에 매료된 사람들은 도회지로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동경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잔뜩 바람이 들어 논밭을 팔아 도회지로 떠나갔다. 사람들로 비좁던 농촌 마을은 젊은 사람이 하나 둘 떠나가면서 빈집이 늘어갔다.

김해에서 사업을 하는 이근호(62)씨는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로 갔다가 운이 좋아 한 3년 만에 돈을 조금 벌었다고 한다. 첫 고향 길에 있는 폼 없는 폼을 다 잡았다가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뻔했다고 한다. 괜히 우쭐거리는 심정에 선글라스도 하나 사 끼고 가죽장갑도 사 끼었다. 머리는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정도로 기름을 잔뜩 발라 넘겼다. 양복 윗도리는 벗어 어깨에 척 걸치고 과일 한 광주리를 사들고 동네 입구에 들어섰다. 그 때의 기분은 세상천지가 완전히 자기 발 아래로 보였다.

그때 마침 자신의 아버지가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오고 있었다. 아버지하며 인사를 꾸벅 했지만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 한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자 그 제서야 아버지는 자식을 알아보고는 반가워서 작대기를 쭉 내밀며 연방 “어서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자식을 보자 갑자기 기운이 솟는지 한 짐을 진 발걸음이지만 훨훨 날았다.

자신은 아무생각 없이 양복을 한쪽 어깨에 그대로 걸치고 아버지 보다 한발 앞서 걸었다. 그 때 마침 초등학교에 선생으로 있는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보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는 한참을 쳐다보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첫 마디가 “야 아 뱄나? 너 걸음이 그게 뭐야… 바로 못 걸어? 이 자식이 서울에서 한 십 년만 살다가 오면 뒷머리가 땅에 닿겠네”며 끓지도 않고 넘었다고 길길이 설쳤다.

그리고는 “눈병 났어? 이 엄동 설한에 선글라스는 무슨 얼어죽을 선글라스냐”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리고는 부모 앞에 버르장머리 없게 어데 선글라스를 쓰고, 이놈의 가 도회지서 못 된 것만 배워 왔다며 넓적한 손바닥이 사정없이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리고는 아버지 지게를 받아지고 와야지 어디서 개폼을 잡고 망나니 행세를 하냐며 어깨에 걸친 옷마저 마당에 짓밟아 버렸다. 머리는 불을 쳐 질러 버리겠다고 부지깽이를 들이밀었다.

아이들은 무슨 큰 구경거리가 난 듯이 우르르 몰려들어 고개를 쭉 내밀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땅바닥에 내 동댕이쳐진 선글라스를 집어들고 “야 밤이다 밤” “달떴다”하며 신기해한다. 나중에는 서로 한번 써 보겠다고 싸움이 붙어 울고불고 난리다. 한마디로 고향 가서 장땡이 폼을 한 번 잡으려다가 개망신만 당했다며 당시의 철없는 행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마산에서 사는 김진국(62)씨는 고향에 가면서 깡통에 든 커피를 몇 개 사 가지고 갔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식이 가지고 온 것이라며 나누어 먹는다고 이웃집에 돌렸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라 먹는 방법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커피의 ‘커’ 자도 몰랐다. 읍내 다방에서 어깨너머로 밀가루를 두 숟가락 떠 넣는 것을 본 것이 전부였다. 먹는 것이 귀한 시절이다 보니 박으로 만든 큰 바가지에 사카린을 넣고 밀가루 두 숟가락을 넣어 휘이 휘이 저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마셔댔다. 달달하면서도 구수한 것이 일품이었다. 모두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입맛을 쩍 쩍 다셨다. 아이들은 달콤한 맛에 하루에 열 천번 커피를 타 먹겠다고 밥그릇을 들고 설쳤다.

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기 어려운 시절이라 속에는 기름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창자가 뒤틀려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한 사발을 벌컥 벌컥 들이켜고 나면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어른들도 화장실을 들락거리기 바빴다. 그래도 커피를 먹어서 배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한쪽 배를 움켜쥐고도 커피를 밥그릇째로 마셔댔다. 그러다 보니 그 큼직한 깡통의 커피가 열흘도 안가 거덜이 나버렸다. 지금도 커피만 보면 30여년전이 어제 같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가정의 보물로 여겼던 라디오•재봉틀 그 귀한 물건은 보기조차 힘들다. 그 하나를 가지기 위해 목메던 그 사람들은 세월의 중심에 비켜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