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강테마박물관

박물관 소식

MUSEUM NEWS

자고나면 세우고 또 세우던 와우아파트 붕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1,799회 작성일 05-09-07 20:23

본문

자고나면 세우고 또 세우던 와우아파트 붕괴!

와르르 무너지자 우르르 철거소동



한국사회는 60년대부터 시작된 급속한 개발과 산업화로 1년이면 강산이 변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수출이 급성장하면서 도시의 팽창은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그러나 화려한 개발과 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많았다.

특히 정경유착과 '대충대충'문화는 오늘 날까지 우리사회에 대물림시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1966년 서울의 인구가 224만명에서 1970년 553만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부산도 116만명에서 187만명으로, 대구는 67만명서 108만명으로 불어났다. 이러한 인구 집중은 종전의 도시 규모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도시마다 판자촌이 즐비해 미관은 물론 도시 발전의 걸림돌이었다. 서울의 청계천과 중랑천변 그리고 산허리마다 판잣집이 빼곡했다. 1966년 서울의 무허가 건물이 13만동에서 1970년에는 20만동으로 계속해서 늘어 서울의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다.

당시 불도저 시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현옥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주택문제 해결 없이는 도시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다고 판단,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68년 12월 3일 서울시내 판자촌 77만평에 3년간 240억 원을 투입해 서민아파트 2000동을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1969년 당시 서울시 예산 416억원 중 51억 원을 시민아파트 건설에 투입한 것만 봐도 당시의 도시 빈민들의 주택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급속한 공업화로 이농이 가속화되면서 도시로 몰린 인구는 1970년 1578만 명으로 전국인구의 51%에 달해 처음으로 농촌인구를 앞질렀다. 군사작전 식으로 밀어 붙인 독재개발은 아파트 하나 짓는데도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안전은 뒷전이고 우선 세워놓고 보았다. 도로 내고 굴 하나 뚫는데 장애물이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공사는 식은 죽 먹기였다. 자고 나면 서울의 모습이 달라졌다.

목숨을 담보로 한 개발 지상주의 졸속 공사는 곧바로 되돌아 왔다. 1970년 4월 8일 아침 6시 반경 와우시민아파트 제15동 콘크리트 5층 건물이 입주 20일만에 폭삭 무너져 내렸다.

아파트 입주자 15가구 70명 중 32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했다. 또 아파트가 내려앉으면서 판잣집 한 채를 덮쳐 1명이 죽고 2명이 다친 대형사고였다. 이 같은 사고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1969년에 마포구 관내에는 와우지구 16개 동과 노고산지구 10개 동의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와우지구 16개 동 중 4개 동을 지명경쟁입찰에서 대룡건설이 3002만 7026원에 낙찰 받았다. 이 공사대금 3000여만원 중에는 시멘트 2700부대, 철근 35t 등 관급 자재비용 932만 7026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26일 준공했다. 70도 경사진 산비탈에 세워진 이 아파트는 기둥 하나에 19㎜ 철근 70개씩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5개 정도씩밖에 쓰지 않았다. 콘크리트 배합비율도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내 콘크리트라기보다는 한 마디로 모래기둥이었다. 산꼭대기라 물이 없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수도 물로 콘크리트를 비비면 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날림공사였다. 와우시민아파트 15동의 설계상 건물 하중은 ㎡당 280㎏인데 무너진 15동의 실제하중은 900여㎏으로 ㎡당 600㎏ 이상 초과되어 있었다. 설계상 하중이 280㎏으로 낮게 된 것은 당시 불량 무허가건물 입주자들의 생활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쌀 한 가마 5220원, 연탄 한 개 16원, 신탄진담배 한 갑 60원 할 당시에 이들의 한달 평균소득은 1만원 이하였다. 그들의 살림살이라야 불과 며칠 분의 양식과 연탄이 전부였다.

서울시는 무거운 짐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을 수용할 아파트를 초가삼간 보다 더 못하게 설계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아무리 빈민들이 사는 집이지만 그렇게는 도저히 지을 수가 없었다.

입주 20일만에 허망하게 내려앉아
시멘트 넣는 시늉만…하수도 물로 콘크리트 비벼

아파트는 틀만 지어주고 내부공사는 입주자들에게 떠 맡겼다. 그러다 보니 입주자들이 내부공사를 하면서 임의로 가져다 쓴 구들장 등의 무게가 엄청났다. 건물붕괴 당시 이 건물 내에는 15가구가 입주해 있었는데 그 중 원래의 입주대상자는 2가구 뿐이었고 나머지 13가구는 입주권을 사서 들어온 중산층이었으니 연탄도 100여장씩 들여다 두었고 피아노 등 가재도구도 있었다.

당초의 계획과는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모래기둥으로는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웠다. 당시 공사에 소요된 비용은 시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평당 1만원 정도 들었다고 한다.

와우아파트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아파트가 모두 하자가 많아 사람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방안으로 분뇨가 흘러들고 냄새가 진동했다. 방바닥이 갈라지고 벽에 금이 가다보니 연탄 가스가 스며들어 매년 수 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옥상에서 놀던 아이들이 떨어져 죽는 일도 허다했다.

말이 아파트지 판잣집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와우아파트 사건 이후 전 시민아파트의 안전도를 점검한 결과 총 대상 405동 중 부수를 해야 할 동 수가 349동이었던 것만 봐도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1971~1977년 간에 모두 101동이 철거되었고 철거비용이 447동 건립비용에 거의 맞먹는 50억 700만원이 소요되었다. 성과 위주의 전시행정으로 배보다 배꼽이 큰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와우 아파트 붕괴는 가요계에도 불똥이 튀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무렵 엄청나게 많은 통기타 그룹이 활동을 했다. 그 중에 김도향과 손창철이 통기타 하나씩 들고 듀엣 가수로 데뷔했다.

이들은 음악적 소질이 뛰어나 어려운 노래도 잘 불렀다. 이 가운데서 <벽오동 심은 뜻은 designtimesp=1596>이란 노래는 가사 자체가 재미있어 크게 사랑을 받았다.

'투 코리언즈'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한복을 입고 나왔는데 어느날 이 노래를 방송에서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이 노래 후렴의 '와르르'였다. 봉황새가 오기를 기대하고 벽오동을 심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봉황새가 오지 않아 그 꿈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가사도 특이할 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가 우리 가락으로 되어 있어 매우 흥겨웠다. 하필이면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할 무렵 서울 와우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졌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군부정권은 민심을 해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붙여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 된'투 코리언즈'는 한창 주가를 높이던 노래가 하루아침에 부를 수 없게 되자 상심한 나머지 가수 생활을 그만 두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조영남도 낭패를 당했다. TBC가 당시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 시스터즈를 초청해 공연을 했다. 조영남이 먼저 노래를 부르고 김 시스터즈가 뒤에 부르게 돼 있었다. 큰 무대에 선 조영남은 자신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신고산타령을 부르면서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 어랑어랑 어허야' 얼떨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신나게 불러댔다. 너무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노래를 끝내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지만 분위기가 냉랭했다.

모두들 "왜 건드려" 하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눈치를 챈 조영남은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왔지만 새벽에 기관원이 들이닥쳐 끌려갔다. 혹독한 시련을 당할 뻔했는데 대학시절에 인연이 된 국내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박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