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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 '잘살아보세'쌀 통일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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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2,130회 작성일 05-09-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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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 '잘살아보세'쌀 통일벼

획기적 생산량 증가 좋았으나 밥맛없고 볏짚 쓸모없어 외면


부족한 식량은 한해 두 해의 문제가 아니었다. 1967~1968년 2년 간 연이은 가뭄은 국민들을 더욱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더욱이 미국 잉여 농산물의 무상 원조가 유상 원조로 전환되고 1972~1973년의 석유 파동과 자원 파동까지 겹쳐 식량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식량증산의 필요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1960년 한국은 곡물 수요의 5분의1을 수입에 의존했는데 계속 늘어 1970년에는 전체의 3분의 1을 수입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1970년에는 쌀 100만t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이것은 전체 쌀 소비량의 2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밀은 1971년 140만t 을 수입했다.

한국은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면서 곡물 수입은 해가 갈수록 눈덩이처럼 늘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좁은 땅에서 많은 소출을 올릴 수 있는 벼 신품종 개발을 끊임없이 추진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 좋은 논 1마지기당(300평) 쌀 수확량은 평균 두 가마도 안된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농가에서 심고 있는 벼로는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특히 일반 벼는 키가 크다 보니 태풍이 불면 쓰러져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고 날씨가 무더워 고온이 지속되면 벼멸구 피해가 심했다. 가을 수확기를 앞두고 발생하는 벼 목도열병은 농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미처 방제 시기를 놓치면 누렇게 익어 가는 벼 모가지에 까만 점이 생기면서 순식간에 논 전체가 하얗게 변해 버렸다. 날씨가 덥고 습기가 많은 날이 지속되면 벼멸구도 극성을 부렸다. 번식력이 너무 좋아 발생했다면 동네 전체가 비상이 걸렸다.

농약이 귀하다 보니 벼멸구가 발생하면 논물을 가득 대어놓고 온 식구가 동원되어 석유를 논물에 뿌려 놓고 벼 밑둥치에 하얗게 붙은 멸구를 물로 씻어냈다.

다행히 비가 자주 내려 기후 조건이 좋아도 병충해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병충해에 강하고 많은 수확량을 올릴 수 있는 벼 품종 개발이라면 정부는 더운물 찬물을 가리지 않았다.

1964년 중앙정보부의 요원들이 이집트에서 볍씨를 훔쳐왔다. 나다(Nahada)라는 이 볍씨는 언론에 기적의 볍씨로 소개되면서 농민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언론에서는 역사 이래 보릿고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적의 볍씨로 소개하면서 연일 떠드는 바람에 사람 둘만 모이면 볍씨 이야기였다. 농민들도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았다.

이 볍씨는 박정희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 '희농 1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희농 1호'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때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신을 '제2의 문익젼이라며 떠벌리고 다니며 콧대가 대단했다.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된 희농 1호는 한국의 기후 풍토에 맞지 않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포기 할 수 없었다. 우수한 품종의 벼가 있다면 세계 어디든지 찾아가 묻고 배웠다.

2년여간의 피나는 연구 끝에 또 한번 '기적의 볍씨'가 선을 보였다. 박정희는 1970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희농 1호의 실패를 의식한 듯 '진짜 기적의 볍씨'라며 매우 조심스럽게 통일벼를 소개했다.

이 벼는 필리핀 마닐라시 교외에 본부를 둔 국제벼연구소(IRRI)에서 개발한 '기적의 볍씨 IR 8'을 들여와 연구를 거듭해 한국 실정에 맞는 통일벼 계통의 신품종 육성에 성공했다.

'IR 8'이 개발된 당시 이 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던 벼 육종가 허문회박사가 이 'IR 8'을 모본으로, 일본 북해도 극조생 자포니카 품종인 '유카라'와 키가 작은 대만 재래종인 '타이쭝짜이라이 1호'간의 잡종을 부본으로 한 삼원교잡을 실시하여, 병충해에 강하고 다수확인 장점만 살려냈다.

이렇게 교잡된 후대를 작물시험장 벼 육종연구팀이 중심이 되어 여름에는 작물시험장 포장에서, 겨울에는 국제벼연구소 포장에서 번갈아 가며 재배했다. 드디어 1971년에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하여 잘 쓰러지지 않는 벼를 만들어 냈다.

이 벼는 이삭이 크고 이삭 당 벼 알이 많이 달려 소출이 많이 나면서 우리나라 일반 벼의 취약점인 목도열병과 멸구에 매우 강했다.

그러나 쌀이 푸석푸석해 밥맛이 없고 찰기가 적어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또 볏짚의 길이가 짧고 억세 사료와 연료용 밖에 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단점은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농민들에게 퍼졌다.

일반미 속칭 '아끼바리'라 불린 일반 벼는 밥맛이 좋고 매우 찰졌다. 또 볏짚의 길이가 길어 소의 사료로부터 초가지붕, 가마니, 멍석, ,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하는 농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재료였다. 이러다 보니 농민들은 통일벼보다는 자연히 일반벼를 선호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통일벼를 심으라고 홍보를 해봤자 소용이 없자 강제성을 띄게 되었다. 군마다 면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지고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다그쳤다. 온통 통일벼 행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생 보기 힘든 지체 높은 군수도 자주 고개를 내밀었다. 들판에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고성이 오고가고 심하면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통일벼를 뿌리지 않는다고 일반볍씨를 빼앗으려는 공무원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벌이는 설전은 한마디로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이런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마을 회관에는 증산 목표량이 큼지 막하게 붙었다. 붉은 펜으로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렸다. 푸짐한 상금을 걸고 군마다 면마다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한마디로 피나는 식량증산 운동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나라 농촌의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통일벼를 반강제적으로 심다보니 지붕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곳곳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농림장관 이었던 김보현이 벼 짚이 짧아 지붕 이엉을 엮을 수 없다고 농민들의 애로사항을 박대통령에 보고했다가 심한 타박만 당했다.

박대통령은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지붕이 중요하다 말이요, 지붕을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 한마디로 일축했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는 농촌 지붕도 초가집에서 슬레이트나 기와집으로 바뀌면서 신속하게 변해갔다.

우여곡절 끝에 통일벼는 우리농가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그 후 이 품종이 지닌 단점을 보완시킨 유신(維新)·밀양 23호·금강(錦江)벼·밀양 30호 품종 등 많은 통일형 우량 품종들이 연이어 개발 보급됨으로써 1976년에 오랜 숙원이었던 주곡의 자급달성을 이루게 되었다.

쌀 생산량은 1966년 392만t에서 1976년 521만t(3621만석)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1977년에는 쌀 생산량 4천만석을 돌파해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1978년에도 이들 통일형 품종들이 전체 벼 재배면적의 76% 이상을 점유하게 되면서 연이어 쌀 생산량 4천만석을 돌파했다. 그야말로 '녹색혁명'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단보 당 수확량도 1966년 287kg에서 1988년 481kg 거의 배 가까이 늘었다.

쌀 증산운동 못지 않게 절미운동도 대단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2회 실시하던 혼분식을 1972년 12월부터는 주5회 정도로 늘려 대대적으로 단속을 했다. 절미운동 위반을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는 수시로 암행단속반이 들어 닥쳐 솥뚜껑을 열었다. 학교는 점심시간마다 도식락 검사를 벌였으며 쌀밥을 가지고 온 학생은 선생님께 혼이 났다.

또 일본인 관광객이 즐겨먹는 생선초밥(스시)에도 잡곡을 섞도록 했다.

입안이 꺼칠꺼칠한 생전 처음 먹어보는 생선초밥에 일본인 관광객들은 기겁을 했다. 이러다 보니 북적대든 일본인 관광객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급기야 생선초밥 업소는 장사가 안 되 못살겠다며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다.

보리로 만든 생선초밥을 들고 김보현 농림부 장관을 찾아가 당신이 먹어보고 판단하라며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그 당시 순 쌀로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경주법주였다. 그것도 엄격한 조건이 있었다.

청와대 외빈접대용을 제외하고 전량 수출하는 조건이 붙었다. 10%이상 보리를 섞도록 아예 혼식 비율까지 정해 식당마다 지침이 내려졌다. 서울시는1975년 8월에는 혼·분식 위반업소 1300여건을 적발 그 중 8개소는 영업취소 691여개소는 1개월 영업정지 시키는 등 강력한 행정조치를 취해 식량사정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학교는 학교대로 보리밥이 건강에 좋다. 쌀보다 밀가루가 영양가가 훨씬 높다는 등 선생님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수시로 쥐를 잡아 꼬리를 끊어 오라고 숙제를 내줘 교실에는 쥐꼬리가 수두룩했다.

요즘 쌀이 남아돌아 쌀 한 포대 더 사기 운동을 보면 당시 통일벼가 우리의 식탁을 풍족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