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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통행금지 사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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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1,630회 작성일 05-09-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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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통행금지 사이렌

에에엥~에에엥~ 암흑시대에 울린 캄캄한 소리




1945년 미군정사령관 포고 1호로 이 땅에서 시작된 야간통금은 82년 1월5일 밤 자정을 기해 전면 해제될 때까지 37년 간 수많은 사연을 만들어냈다.

밤 12시만 되면 술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울렸던 공포의 사이렌 소리. 달리던 차도, 상점의 불빛도, 취객의 발걸음도 일순간에 사라지면서 거대한 도시는 갑자기 정적이 감돈다. 도시의 기능은 한마디로 올 스톱이다.

개미 라도 한 마리 얼렁거리면 길 저쪽에서는 사정없이 호루라기를 불어댄다. 미처 가게문을 닫지 못한 상점은 그 소리에 놀라 정신 없이 셔터 문을 내리기에 바빴다. 방범대원과 경찰의 눈을 피해 두더지처럼 뒷골목을 돌고 돌아 귀가 길을 재촉하던 아저씨도 간담이 서늘하다.

도로 요소 요소에는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길 한복판을 막아섰다. 어느 누구도 새벽 4시까지는 그 바리케이드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의 밤 11시는 초저녁이지만 그 때는 한 밤중이었다. 갑자기 시내에는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시내버스 주차장에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퇴근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버스는 비좁아 발 디딜 틈도 없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오다 보니 택시 잡기도 전쟁이었다. 길 양편에는 지나가는 택시를 보고 고래고래 목적지를 외친다.

택시는 적고 타는 사람은 많다보니 합승은 공공연했다. 통금시간에 임박하다보니 더운물 찬물 가릴 겨를이 없었다. 방향만 비슷하다면 몇 사람이든 간에 일단 타고 봤다.

감쪽같이 사람들 사라져

택시들은 통금에 걸리지 않으려고 총알같이 달린다. 정각 12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그 많은 사람들이 감쪽같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시의 밤거리는 말 그대로 암흑 천지다. 좋게 말하면 밤다운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도 사이렌이 울리면 재빨리 여관으로 들어가 피하든지 아니면 골목골목을 숨어서 집으로 가야했다. 술 먹다가 통행금지 시간에 걸리게 되면 새벽 4시까지 셔터를 내려놓고 술을 마셔야 했다.

재수가 없어 경찰이나 방범대원에게 걸리는 날이면 꼼짝없이 경찰서에서 밤을 새웠다. 새벽에 나오는 것은 운이 좋아야 했다. 대부분 즉결 심판을 받아 하루 이틀 구류를 살아야 했다.

당시 여자들이 남자를 만나면 남자들에게 시계를 주지 말라 것이었다. 잘못하다가는 큰 코 꿰인다는 것이었다. 그 때 당시 직장에 다녔던 이순호(48)씨는 여자 친구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 시계바늘을 한 시간쯤 뒤로 살짝 돌려놓고 술을 먹다가 여자 친구에게 발각되어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그 날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올해 52살인 김선태씨는 여자 친구와 데이터를 하면서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잡고 있을 목적으로 시간을 끌었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런 저런 핑계로 여자 친구를 통행금지 시간까지 무사히 잡는데 성공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아마 그 때의 통행금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부인과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기들은 사이렌이 맺어준 부부라며 통행금지예찬론을 펴며 함박 웃음을 짓는다.

연애 거는 남성들의 재치

창원에서 직장을 다니다 정년 퇴직한 이재철(57)씨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택시기사가 그대로 내려놓고 줄행랑 치는 바람에 경찰에 붙들려 코가 땅에 닿도록 빌어 간신히 유치장 신세를 면했다며 그때의 순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일년 중 크리스마스 이브와 제야에는 통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사연도 만발했다. 지금 40대 중반 이후라면 누구나 이날에 한가지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저녁 7시가 넘어서면 마산 창동일대는 몰려나온 인파로 숲을 이루었다. 길은 보이지 않고 까만 머리만 보였다.

통행금지가 없다는 그 하나 만으로도 사람들이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술집과 다방은 대목 중에서도 큰 대목이었다. 가게마다 사람이 터져 나갔다. 젊은이들의 즐겨 찾았던 다방과 음악감상실 등에는 당시 두 배의 찻값을 받았지만 자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해방감에 젖어 건배를 외치는 도시는 흥청망청이었다. 이날은 여관도 일찌감치 만원이 되어 불이 꺼졌다.

부산에 사는 이근우씨는 7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산에 출장을 와 술집에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이날 일찍이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여관을 찾았지만 방이 없었다고 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 신마산에서 합성동까지 여관마다 다 가봤지만 그 날만은 자기가 잘 곳이 없더라는 것이다.

통금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도성의 크고 작은 4대문 3소문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한 시각에 울리는 인경 종소리에 따라 일제히 열리고 닫혔다.

전국의 도시 들썩 들썩

오경삼점인 새벽 4시쯤에 인경종이 서른 세 번 파루(통금해제)를 알리면 도성 7문은 일제히 활짝 열리었고, 일경삼점인 오후 7시경에 스물 여덟 번 인정(통행금지)을 알리면 도성문은 일제히 닫혔다.

인종이 울리면 성 안팎은 교통이 끊기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파루종은 불교에서 말하는 33천(天)에 응해서 33번을 쳤고, 인정 종은 28숙(宿)에 의하여 28번을 쳤다. 이렇듯 인경이 먼동트는 것과 땅거미가 지는 것을 알린 것은 백성들의 활동과 휴식을 엄하게 다스리기 위한 제도였다.

다시 말해 새 나라를 개국 한 이성계가 백성들로 하여금 힘껏 일하게 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지난 64년 12월 26일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이틀전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녀 청소년 3000여 명이 서울 도심의 산에서 술을 마시고 트랜지스터 음악에 트위스트를 추며 하룻밤을 지낸 후 내려온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로 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무총리가 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를 긴급 소집해 대책 회의를 열었다. 당시 신문 사회면에는 '광란의 밤'이란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다.

치안 질서를 둘러보기 위해서 거리로 나섰던 내무부 장관을 몰라보고 매춘부들이 쉬었다 가라고 손목을 잡아당기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시내만 아니었다. 전국의 도시가 들썩했다고 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이날 서울 종로 명동 등 은 물론 전국의 주요 도시가 말 그대로'해방구'였다. 서울 도심에 쏟아져 나온 인파는 무려 35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 인파는 당시 대전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전국적으로는 수백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해방감에 젖은 청춘남녀들은 영화 필름을 감아 만든 10원짜리 뿔피리 입에 물고 괴성을 지르며 현란한 몸짓으로 서울의 밤거리를 누빈 것은 한마디로 진풍경이었다. 이날의 광경을 지켜본 당시의 많은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축제의 한마당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