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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의 3대 히트곡, 보릿고개 시절 기러기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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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2,024회 작성일 05-09-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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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의 3대 히트곡, 보릿고개 시절 기러기 아빠

생과 사를 넘나든 배고픔 서러움 씻고자 흐느끼며 불렀던 애절별곡




산에는 진달래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 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 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있나/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 하늘에 조각달 강엔 찬바람/ 재 넘어 기적소리 한가로운 밤중에/ 마을마다 창문마다 등불은 밝은데/ 엄마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

서민들의 애환을 가슴 절절이 담아낸 이'기러기 아빠'는 "노랫말이 월남에 파병된 아빠가 전사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걸 빗대서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며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남대문 과일장수의 딸로 태어난 이미자는 60년대 트로트 전성시대를 구가한 스타다. 그의 애절하고 고운 가창력은 서민의 가슴을 파고들만큼 깊은 호소력을 지녔다. 그래서'엘레지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59년 열아홉의 나이로 가요계에 데뷔한 그녀가 40년 간 부른 노래는 2064곡. 이 가운데 동백아가씨, 기러기 아빠, 섬 마을 선생님 등 그의 3대 히트곡을 비롯해 100여곡이 크게 히트했다. 이미자는 처음 받는 곡도 두세 번만 들으면 감정까지 실어 불러 가히 천재성을 타고났다고 한다.

23살에 결혼한 김순자(60)씨는 결혼 후 이듬해 남편이 월남에 파병되어 가는 바람에 애를 데리고 몇 년간 혼자 살았다고 한다. 그 때 이미자의 노량기러기 아빠'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 흡사해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그 노래를 듣다가 부르다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와 시어머님께 혼이 났다고 한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1964년 7월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 간 32만여명이 참전해 4960명이 전사했다. 부상자는 1만명이 넘었다. 파병부대는(주월사, 맹호, 백마, 청룡, 십자성, 비둘기)등 8개 부대였다.

이'기러기 아빠'는 매년 되풀이되는 보릿고개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이별의 애환을 생생하게 담아내 더욱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마디로 보릿고개는 우리 민족이 넘어야 했던 가난의 고개였다. 가을에 거둔 쌀이 겨울 한철 나기에도 부족해 이듬해 봄보리가 날 때까지 굶주리던 넘기 힘든 고비를 말한다.

개나리·진달래가 만발한 봄이 되면 지금은 꽃놀이로 더 없이 좋은 계절이지만 그 당시는 너무나 괴로웠다. 대부분 식량이 떨어져 당장 먹을 저녁거리도 없어 쩔쩔맨다.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다 보니 젖이 안나와 젖먹이 애들이 울어댄다. 모두 비슷한 처지라 보리쌀 한 그릇도 꾸어 올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들판의 보리만 쳐다보였다. 보리 이삭이 패기가 무섭게 풋보리를 베어와 절구통에 찧어 먹거나 보리 이삭을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산나물 죽을 쑤어 먹어야 했다. 거친 음식을 많이 먹다보니 변이 굳어져서 용변을 볼 때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나왔다. 그 비참함은 당시 흔한 일 되다보니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굶주림, 그 가난은 온 국민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자 눈물겨운 삶의 고개였다. 따라서 그 고개를 잘 넘으면 한 해를 그럭저럭 살 수 있고 넘지 못하면 죽음과 직결되는 운명의 고비였던 것이다.

1963년에는 보리마저 흉년이 들어 수십 년이래 보릿고개가 제일 지독했다고 한다. 그 해 태풍과 비가 잦아 온 나라가 보리농사를 망쳤다. 수확기에 불어닥친 비바람은 온 국민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누렇게 익은 보리는 오래 동안 비를 맞아 싹이 나면서 썩어버린 것이다. 농민들은 썩은 보리지만 한 톨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온 식구가 총동원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보리이삭을 거둬들이느라 들판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깔렸다. 한마디로 보리 한 이삭에 목을 맨 처절한 생존전쟁 이었다. 다급한 나머지 보리 모가지만 꺾어 날랐다.

그리고 가마솥에 볶았다. 방마다 보리를 널어 말리느라 빼곡한 틈이 없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끊어다 말렸지만 10%도 건지지 못했다. 건진 보리도 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집집마다'어찌 살꼬'한숨소리가 골짜기를 메웠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매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 벗겨 하루 하루를 연명했다.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은 집은 산나물을 뜯어다가 쌀 한 주먹을 넣어 멀건 죽을 끓여 마셨다. 말이 죽이지 실제로는 나물국이었다. 무 밥을 먹는 집은 부자 집 이었다.

곡식 한 톨 구경 못하고 산나물과 나무 껍질로 연명하니 얼굴이 붓고 손이 부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밥 달라 울고 늙은 부모님은 하도 많이 굶다 보니 기운이 없어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곳곳에서 허기로 인해 죽는 이가 속출했다. 비참한 보릿고개를 더 이상 참다못해 아버지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무작정 돈벌이를 떠나야 했다.

자녀교육 때문에 마누라와 아들을 외국에 보내고 혼자남아 직장에 다니면서 송금하는 요즘의 '기러기 아빠'와는 아주 달랐다. 그 때는 쌀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너무 너무 불쌍한 '기러기 아빠'였던 것이다.

도시에 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게를 지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해봐도 일을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도 하루 두끼 먹기도 어려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끼니도 굶어야 했다.

합천이 고향이라는 박문수(52)씨는 어릴 때 배가 너무 고파 돈벌이간 아버지가 하마 돌아올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는 것이다. 엄마는 날만 새면 찬물 한 사발 마시고 나물 뜯으러 산으로 가고 없었다. 동생과 매일 마을 밖에 나가 하루종일 신작로를 바라보면서 기다리다 지쳐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자고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매년 가뭄과 흉년이 들다보니 우리나라 경제도 갈수록 나빠져 국민들의 하루하루 살이가 말이 아니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다보니 사람들은 거의 자포자기하였다.

당시(1962년) 한국의 경제여건을 보면 세계 125개 국가 중에서 국토면적은 약 101위, 인구수는 2500만 명으로 27위, 인구밀도 3위, 1인당 국민소득은 83달러로 98위였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면서도 식량을 1년에 약 200만~300만t씩 수입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둘만 모여도 '엽전이 별수 있나''와라지 주제'에라는 말이 유행했다. '와라지'라는 것은 '짚신'이라는 뜻의 일본말이라고 한다. 일본은 명치 유신 이후 머리를 짧게 하고 양복과 구두를 신게 했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가난한 천민들을 '와라지'라며 천시했다. 그들은 일제시대 때 짚신을 신는 한국인을 보고 '와라지'라고 했다. 여기서 '엽전'이나 '와라지'는 우리국민을 뜻한다.'달러가 판을 치는 세상에 엽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구두를 신고 다니는 세상에 우리는 짚신이나 신어야 할 신세'라는 뜻이다.

이처럼 국민들의 사기는 말 할 수없이 저하되어 있었다. 둘만 모이면 신세 타령에 보리밥이라도 배터지게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기러기 아빠'는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난 사람, 이역만리 월남 땅으로 파병간 군인을 남편으로 둔 여인,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버림받은 사람, 돈 벌러 간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 등 갖가지 애절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