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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땅에서 울려퍼진 '외국 노동자' 들의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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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1,608회 작성일 05-09-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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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땅에서 울려퍼진 '외국 노동자' 들의 애국가

1960년대 서독으로 간 광부·간호원...절도 못부르고 울음바다



구름떼처럼 몰린 신청자

65년 노동청의 독일파견 광부를 500명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고졸출신 이상으로 자격 조건을 내걸었지만 무려 5만여 명이 몰렸다.
정규 대학을 나온 사람도 수두룩했다. 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다. 명문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자리가 없어서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문제의 해결을 '인력수출'을 통해 찾았다.

한국정부는 1966년 서독과 특별고용계약을 맺고 그 해 12월21일 75명의 광부를 첫 파견했다. 1966년부터는 간호사 노동자도 받아들였는데 그 수는 1977년까지 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광부 파견은 한·독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당시 서독은 전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근무여건이 열악한 3D 업종의 하나인 광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서독은 모자라는 3D 업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가난한 한국에 손을 벌렸고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의 70% 이상이 고졸자였고 30%가 대졸 혹은 대학 중퇴자였다. 그 중에는 의사, 기업 간부, 공무원, 변호사, 교사 출신 등 당시에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도 상당수였다. 실업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일부러 연탄에 손 부비고

지난 58년 김포 국제공항이 문을 열었지만 일반 이용객이 없었다고 한다. 70년대 초까지 주 이용객은 서독으로 떠나던 광부와 간호원 그리고 주한 미군이었다. 이것만 봐도 그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독일 파견 지원자들의 신체검사도 엄격했다. 손이 고와서 면접에 떨어질까 봐 틈만 나면 손을 연탄에 비벼대고 며칠을 진흙에 넣어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고 한다. 몸무게가 55㎏에 못 미치는 사람은 살을 찌우기 위해 하루에 밥을 몇 번이고 먹었다. 일하면 살 빠진다. 먹고자고 먹고자고만 반복했다.

그것도 모자라 면접 앞날은 물을 주전자에 받아 놓고 밤새 물을 들이켰다. 주머니에 쇳덩어리를 넣은 채 몸무게를 다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다고 한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기쁨도 잠시였다. 서독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라인강 인근 탄광지대의 지하 1200m 막장에 투입돼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땅속에서 나오는 뜨거운 지열에 숨이 막혔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고국의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아들 딸들의 얼굴이 눈 앞에 아롱 거렸다. 오직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며 하루 열시간 이상 석탄을 캤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안전 사고도 많았다. 굴이 무너져 동료가 숨지는 일도 허다했다.

임금도 고된 일에 비해서는 형편없이 낮았다. 당시 서독광부의 월 임금이 800마르크였던 반면 한국광부는 600마르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악착같이 모아 66년 한해동안 한국에 부쳐온 액수는 180만 달러로 외화가 부족한 우리나라에 숨통을 열어줬다고 한다.

60년대 초 민간차원에서 진행된 간호사의 독일 진출은 69년 양국 간 간호요원협정이 체결되면서 진출이 급격히 늘어났다.

한국에서 정식 간호대학이나 전문학교를 마치고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던 이들은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시골병원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그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기절했다.

도망 치고 싶었지만 갈곳이 없었다. 손이 떨리고 온몸이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알코올로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졌지만 그래도 무섭고 두려웠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딸이 죄 라며 이를 악물었다.

호소할 곳 없었던 서러움

독일은 의학수준도 높고 보수도 많다는 당초의 기대와 꿈은 하루아침에 날아 가버렸다. 간호 업무보다는 뒤치다꺼리가 하루 일과였다. 3교대로 돌아가면서 침대시트와 환자복을 빨고 병실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온갖 궂은 일은 모두 우리 간호사의 몫이었다.

당시 광부들의 경우 고된 막장일에 재해를 입어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몸이 아파 하루 이틀만 결근해도 해고 장이 날아와 안 죽을 정도면 일을 해야했다. 간호사들 역시 조금만 눈에 거슬리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는 등 갖은 이유로 병원측이 일방적으로 귀국을 요구했다.
이처럼 비인간적 처우문제에 시달렸지만 호소 할 곳도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아쉬운 쪽이 우리였으므로 한국 영사관이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64년 12월6일부터 12월13일까지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했다.

서독으로 타고 갈 항공기 없어 미국에 빌리려 했지만 쿠데타정부에는 빌려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거부로 독일에 갈 수가 없었다.

어려운 사정을 안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 비행기를 보내 줘 구겨진 자존심을 안고 독일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거리에는"박정희 대통령 독일방문을 축하합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고국의 대통령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었다. 파견 간호사와 광부들은 이역만리까지 날아온 고국의 대통령 보자 타국살이의 설움이 복받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여곡절끝 박정희 도착

박대통령은 도착하자마자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보기 위해 탄광촌으로 달려갔다. 고국의 대통령을 보기 위해 석탄에 거슬린 시커먼 얼굴들이 한던 일을 중단하고 환영 행사장으로 모였다.

대통령 연설에 앞서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시작하자마자 울음바다가 됐다.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연설을 하려고 연단에 섰지만 연신 눈물만 흘렸다. 옆에 앉은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그들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연 박정희 대통령은"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일 합시다" 말문이 막혀 같은 말만 반복했다. 같이 간 수행원도 취재기자도 모두가 뒤엉켜 울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뤼브케 대통령도 따라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행사장을 떠나면서"여러분 건강해야 합니다 고국에서 건강하게 다시 만납시다"라며 광부들의 손을 일일히 잡았다.
후일담에 의하면 그 날 행사는 한마디로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이 눈물로 흘러 내렸다고 한다. '격세지감'40년이 지난 지금 외국의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안고 끝없이 밀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국경제의 주춧돌을 놓은 그들. 그 날의 회한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인생의 황혼기를 맞고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