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강테마박물관

박물관 소식

MUSEUM NEWS

70년대 최대 히트곡 '영자송' 을 아시나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2,901회 작성일 05-09-07 20:06

본문

70년대 최대 히트곡 '영자송' 을 아시나요

- 몸뚱아리 하나로 버티며 설움에 겨워 불렀네 -



영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성히성히 자~알 있느냐/ 여기에 있는 이 오빠는/ 사장님이 아니란다/ 서울하고도 공사판에서/ 빡빡 기는 노동자란다


한때 가요계의 최대 히트곡은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30년 전에 밑바닥 인생들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불렀던 '영자송'을 편곡해 만들었다고 한다. 서민의 애환을 담은 '영자송'은 30년 넘게 수많은 뒤 골목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이 노래는 장소와 처한 환경에 따라 노랫말도 달랐다. 군대에서는'빡빡 기는 이등병으로'건설현장에서는 '벽돌 쌓는 노가다'로 공장에서는 '공돌이' '공순이'로 힘없고 소외 받던 이들의 이름은 다 갔다 붙였다. 특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이 노래는 공단주변의 대폿집에서 어둠이 깔리면 어김없이 불리어 졌다.

사나이들의 복받친 울음

특히 군에를 갔다온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다.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단번에 따라 부르곤 했다. 힘든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서쪽으로 기우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에 절로 흥얼거려 졌던 노래다.

70년대 초에 군 생활은 한 김영식(50)씨는 신병훈련시절 사격 성적이 좋지 않아 전 중대원들이 늦가을 비가 내리는 사격장에서 몇 시간을 초죽음이 되도록 굴렀다고 회상했다. 온 몸은 흙탕물 범벅이 되어 비 맞은 쥐 보다 더 초라했다. 비에 젖은 화랑 담배 한 대를 물고 긴 연기를 내뿜으면 '영자송'을 불렀다.

전 중대원들이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노래를 다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30년 전의 일이지만 그 때 불렀던'영자송'은 어찌 그렇게도 사나이 마음을 울렸는지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이 눈에 선 하다고 말했다.

창원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이광열(47)씨는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최전방에 배치를 받아 군용트럭을 타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어찌나 골이 깊고 첩첩산중이라 양팔을 벌리면 이산과 저 산이 닿을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은 산과 군부대뿐이고 민간인이라고 하루종일 한사람도 볼 수 없었다며 이제 가면 다시 집으로 돌아 올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여기에 있는 이 오빠는 /대장님이 아니란다 /빡빡 기는 이등병이란다…'/ '영자송'이 깊은 가슴으로부터 흘러지더라는 것이다.

70년대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담은 이 노래가 30년 넘게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진 것도 당시 산업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수출로 통했다.

수출 제일주의로 치던 70년대는 '전근대적인' 60년대와는 확연히 달랐다. 1970년 10월에는 온 국민들이 갈망하던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는 1964년 1억 달러 수출을 기념해'수출의 날'을 제정한지 6년 만에 이룩한 성과라 온 나라가 감격과 축제 분위기였다.

그리고 7년만인 1977년에는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했다. 이는 경제대국으로 지칭되는 서독이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 돌파까지 11년, 일본이 16년이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것이었다.

잘사는 분…못사는 놈

1969년 10월 상공장관으로 부임한 이낙선의 군대식 밀어붙이기가 조기 달성에 당당한 한몫을 했다. 이낙선은 1966년 국세청장 시절 1965년 546억이던 국세징수액을 700억 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각오를 다지기 위해 차량 번호도 700번,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도 700억 원이라고 크게 써 붙이고 다녀 세간의 화제를 뿌렸던 인물이다. 사실상 수출 목표 달성도 총칼 없는 전쟁이었다.

1970년대 모두가 잘 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시기. 무작정 보따리를 싸들고 돈을 벌겠다고 상경하는 젊은이들이 봇물을 이뤘다. 이시대 농촌 인구는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적은 농지에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하루하루 살기가 비참했다. 이러한 농촌인구의 과밀화는 대량 이농으로 이어졌다. 광복직후 서울 인구는 80만 정도였으나 1960년에는 240만명을 넘어섰다. 농촌과 도시 이주민의 94%가 서울로 몰렸다.

66년 서울 인구는 3백79만명에 불과했으나 70년에는 5백50만명으로 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급속하게 밀어닥치다 보니 일자리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촌뜨기들이 갈곳은 뻔했다. 판자촌을 전전하며 잠자리를 해결하고 무슨 일이던 닥치는 데로 해야 했다.

도시의 깊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며 허름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대폿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위안 받을 유일한 곳이었다. 막걸리 서너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면 거나하게 취기도 돈다.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젓가락 장단에 '영자송'날리면 서울의 밤을 울렸던 것이다. 사실 '영자송'은 이 노래뿐이 아니었다. '영자씨의 입술은 대폿집의 술잔입니다/ 이 놈도 빨아보고/ 저 놈도 빨아보고…'. 영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동생과 부모를 위해 몸을 던졌던'우리의 누이'들이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1970년대 초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법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한 '3선 개헌' 시도와 긴급조치 발동으로 어수선했다. 사회 각 분야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강화돼 사회 비판적인 내용은 통제가 심했다.

영화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농촌 근대화에 앞장서는 주부들의 노력을 그린 <아내들의 행진 designtimesp=2090> 같은 체제 홍보적인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수많은 영자들은 잊혀져

그러나 이 같은 현실 속에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designtimesp=2096>,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designtimesp=2097>나 <겨울여자 designtimesp=2098> 같은 영화들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송재호 염복순이 주연한 <영자의 전성시대 designtimesp=2099>는 70년대 한국사회의 변화와 고통을 함축적으로 드러냈다. 연인원 36만명이 동원 되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영자가 처음 일자리를 잡은 곳은 어느 부잣집의 가정부. 돈 없고 기술 없고 '빽' 없는 시골 아가씨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영자는 주인집 망나니 아들로부터 강간을 당한다.
비난의 화살은 폭력에 의해 순결을 잃어버린 피해자에게 돌아온다. 영자는 주인집 아들과 결혼해 자신의 죄의식을 은연중에 용서받길 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불결하고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영자는 공장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만원 버스의 차장이 되었지만 바로 한쪽 팔을 잃어버린다. 그나마 건강한 몸이 유일한 재산이던 영자로서는 청전벽력 같았다.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설자리가 없는 영자는 창녀의 길을 택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영자는 성공을 꿈꾸며 대도시로 온 젊은 여성들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당시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공장에도, 부잣집 부엌에도, 싸구려 술집에도, 영자는 많았다.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들은 모두 영자였다.

그런 점에서 <영자의 전성시대 designtimesp=2104>는 무언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사회에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어둑한 뒷골목에서 막걸리와 독한 소주로 빈속을 달래던 그들의 한과 땀이 우리경제의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