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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의 에 얽힌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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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금강테마박물관
댓글 0건 조회 1,738회 작성일 05-09-0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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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의 <동백아가씨>에 얽힌 사연들

가슴 서늘하게 흘렸던 눈물



"헤 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이미자 노래인생 40년을 대표하는 곡<동백 아가씨 designtimesp=2226>. 이미자의 이름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이다. 우리 가요 사에 있어 <동백아가씨 designtimesp=2227> 만큼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도 드물다. 그 자체로 현대사의 한페이지가 되어버린 노래. 군사정권 하에서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 곡으로 묶여야 했고 87년 해금으로 사회에 불기 시작한 민주화를 실감케 했던 노래다.

<동백아가씨 designtimesp=2229>는 그 당시 신성일 엄앵란이 주연한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가였다. 이 불후의 명작이 작곡에 걸렸던 시간은 2시간 남짓했다고 한다. 작사자 한산도씨와 작곡자 백영호씨는 30년 넘게 살아온 고향 부산의 아름다운 동백섬의 정서가 이 노래에 흘렀다고 한다.

제목이 촌스러워 레코드사에서 판을 내놓은 이 노래는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자는 직접 작곡가 백영호씨와 레코드를 들고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한번 틀어달라고 DJ에게 사정을 했다. 그러한 활동에 힘입어 동백아가씨 LP판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서울 명보극장에서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던<영화 동백아가씨 designtimesp=2231>도 을지극장으로 상영장소를 옮겨가면서 노래와 더불어 승승장구 하기 시작했다.

LP판 한 장에 3백30원 당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레코드사 앞에서 2일이 넘게 기다려서야 겨우 구입이 가능했다. 영화와 음악이 동시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빅히트를 기록하던 동백아가씨 음반이 몇 장이나 팔려나갔는지는 정확히 집계는 없다고 한다. 대략 일년만에 십 만 장이 팔렸다고 한다.

요즘의 밀리언셀러에 해당하는 엄청난 판매량이었다. 늘어나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전 직원들이 밤을 새워 찍 어도 하루 몇 백 장 찍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리점들이 판을 달라고 줄을 섰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다. <동백 아가씨 designtimesp=2234> 의 인기가 워낙 좋아 다른 레코드를 끼 워 팔아도 군소리 없이 고맙게 받아갈 정도였다.

러나 음반발매 2년만인 66년에 <기러기아빠 designtimesp=2236> <섬마을 선생님 designtimesp=2237> 등과 함께 방송금지를 당하게 되고 70년에는 판매금지까지 당하게된다. 그후 21년 동안이나 공식적으로 접할 수 없었지만 밑바닥 정서를 타고 흐르면서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 나갔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온 사람. 헤어진 사람이 그리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불러졌다.

60년대 월남에 파병된 김판두(59)씨는 당시에 이미자씨가 위문공연을 왔는데 <동백아가씨 designtimesp=2239>를 부르자 장병들이 처음에는 너무나 좋아했다고 한다. 노래가 2절로 접어들자 이역만리 떨어진 고국과 그리운 가족 생각에 눈물 바다가 됐다고 한다. 특히 <동백아가씨 designtimesp=2240>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한국 여성들의 인내와 한을 가장 절절하게 담아냈다.

매년 다치는 보릿고개 초근피로 연명하던 시절 우리 농촌의 여성생활이란 남성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육체노동이었다. 식구가 많다 보니 죽 한 그릇도 안 돌아와 허기진 배를 잡고 밤을 새우는 것이 허다했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었다. 식구가 많으니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보릿고개」 때가 되면 나물을 캐다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배고파 우는 아이를 보다 못해 머리카락을 짤라 팔고 수건을 두르고 다녔다. 이 머리카락은 가발로 만들어져 외국으로 수출하는 서글픈 현실을 만들어 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촌의 아가씨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함에 무작정 도시로 나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은 조그마한 뒤구석 방 하나를 얻어 몇 사람이 먹고 자면서 돈을 모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한 섬유공장을 들렀다. 시골에서 온 앳된 한 소녀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영어를 몰라 업무에 지장이 많다는 눈물어린 소녀의 말에 대통령도 수행자들도 말을 못하고 한동안 분위기가 숙연했다.

안내한 사장이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야간학교가 생겨났다. 야간학교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수 천명이 몰렸다. 배움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 했는지 몸이 아파도 결석하는 학생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겠다고 나서서 교사도 쉽게 구했다. 그들은 일년에 한 두 번 고향에 갈 때에는 꼭 교복을 입고 갔다. 고향 땅에서 교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공장으로 돌아올 때 이들은 자기 고장의 잔디를 가지고 왔다. 그것을 학교 마당에 심었다. 그 잔디는 이를 '팔도 잔디밭'이라고 불렀다.

졸업식 때는 3년 간의 어렵고 힘들게 해냈다는 자부심, 가난했기 때문에 겪었던 설움이 복받쳐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엉엉 소리를 냈다. 후배도 울었고, 선생님도 내빈도 울었다.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어 행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한국 경제의 부흥은 그들의 피와 땀 눈물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