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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깃발 꽂으면 “하느님 땅이라도 어림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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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2,872회 작성일 05-12-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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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깃발 꽂으면 “하느님 땅이라도 어림 없네”
70년대 새마을 운동의 기억



초가집과 사람 하나 간신히 다니는 좁은 골목길 그리고 흙 반 돌 반으로 쌓은 돌담은 70년대만 해도 우리 농촌의 상징이었다. 40대 이상에게는 늘 가슴속에 지니고 다니는 추억이자 포근한 고향이다. 지붕 위에는 하얀 박꽃이 피고 아침 빨랫줄에는 제비가 빼곡이 앉아 재잘거렸다. 밥짓는 연기가 소리 없이 피어오르고 돌담에 둥지를 튼 꿀벌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꿀을 물어다 날랐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분명 초가집과 빨랫줄에 앉은 제비•굴뚝에서 흐느적흐느적 피어오르던 저녁 연기는 한 폭의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때는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 생활은 하루라도 빨리 탈피하고 싶은 지긋 지긋한 삶이었다. 남들처럼 폼 나게 한번 잘살아 보려고 돈벌이에 피를 튀기다 보니 물질은 풍요해 졌다. 반면에 세상 인심은 부른 배만큼 더 각박해졌다. 앞만 보고 달려온 중•장년층들에겐 지겨웠던 초가집과 좁은 골목길이 새삼 그리워진다. 비록 배는 고팠지만 서로 다독이며 살았던 진한 정 때문이 아닐까.

중•장년층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초가집과 돌담, 그리고 좁은 골목길은 70년대를 들어서면서 사라져 갔다. 그 시절 수 천년 대물림 가난을 몰아내고 사람답게 살아 보자는 구호는 전국을 메아리 쳤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새마을 노래가 지겹도록 울려 퍼졌다. 마을마다 새마을 지도자를 뽑았다. 수시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새마을 만들기 정신교육을 했다. 마을마다 새마을 기가 펄럭이고 사람마다 새마을 모자를 썼다. 모든 것은 새마을로 통했다. 자고 나면 마을길은 넓어졌고 초가지붕은 슬레이트로 돌담은 벽돌담으로 바뀌었다. 부엌도 고치고 마당도 고쳤다. 지금처럼 포클레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삽과 괭이로 해냈다. 한마디 단군이래 최대의 변화였다. 한 사람 비켜가기도 좁은 골목길은 소 구루마가 다닐 정도로 넓어졌다. 좁은 개울에 통나무를 걸쳐놓고 그 위에 솔가지를 얹어 흙을 덮어 다녔던 다리도 걷어내고 철근을 놓고 시멘트 다리로 바꾸었다.

비가 오면 물이 불어 사람이 다니지 못했던 큰 내도 시멘트로 다리를 놓아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깃발을 올린지 불과 2~3년 만에 농촌의 생활환경이 360도로 달라졌다. 웬만한 새마을 공사는 허가라는 행정절차도 필요 없었다. 새마을 깃발을 꽂아 놓는 것이 바로 허가증이었다. 새마을 깃발 앞에는 누구도 옳다 그르다 감히 입을 대지 못했다. 그 새마을 운동의 중심에는 강력한 새마을 지도자가 있었다. 새마을 지도자들은 대부분 마을의 유지들이 맡았다. 평소에도 동네 일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는데 새마을 지도자라는 감투까지 울러 멨으니 그 위세도 대단했다.

마을길을 넓히고 굽은 길을 바루고 상수도를 만드는 공사는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혔다. 그 얽힌 이해관계를 풀어내는 것은 새마을 지도자들의 몫이었다. 모두다 길은 넓히고 싶고 내 땅을 주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새마을 공사판에는 한 평이라도 내 땅을 손해 안 보려고 옥신각신했다. 왜 내 땅만 만이 들어가느냐며 고래고래 핏대를 세우는 일이 허다했다. 그때마다 새마을 지도자는 지금이 어느 세월인데 내 땅, 네 땅 찾고 있냐며 호통을 쳤다. 논 한 복판으로 길을 내면 안 내놓고 네놈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며 몰아세웠다. 한마디로“길 넓히는데 길옆에 있는 논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단군이래 최대의 사업인데 하느님 땅이라도 안 내놓고는 못 배긴다. 그러니 까불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것이었다. 길에 땅 좀 들어갔다고 법에다 호소하고 동네방네 떠들어 봤자 들어 줄 놈도 없고 네 입만 아프니 찬물 먹고 속 차리라고 핀잔이 만바가지다.

새마을 지도자가 줄을 그으면 그 땅은 바로 도로가 되었다. 길을 넓히는데 집 울타리인 돌담이 장애가 되면 헐어버렸다. 길이 나던 곳에 조상 대대로 서 있던 감나무도 베어버렸다. 한마디로 새마을 운동에 장애물은 있을 수 없었다. 무슨 공사든 시작했다면 순식간에 이뤄냈다. 새마을 지도자의 저돌적인 사명감에 땅 주인들은 속만 끙끙 앓았다. 한마디로 당시의 새마을 사업은 땅값도 일삯도 한푼 없었다. 자재 값 외는 모두다 공짜였다. 지금 같으면 땅 편입 보상이다 뭐다 하여 10년이 걸려도 못할 일들을 단 2~3개월만에 어깨 짐으로 해 치워 버렸다. 군부 독재 시절인 만큼 새마을 운동은 완전히 탱크였다.

농로가 생기고 마을길이 넓어지면서 농촌에는 리어카가 들어오고 경운기도 들어왔다. 농촌은 수 천년 내려오던 지게 밑에서 해방되면서 기계화 영농의 디딤돌을 놓은 셈이었다.

창원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상운(62)씨는 시골에서 살다가 80년대에 도시로 나왔다고 한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시골은 생활환경이 말이 아니었다. 신작로라고 해봤자 택시도 간신히 다닐 수 있었다. 농로가 없어 등짐으로 농사를 지었다. 70년대 새마을 공사 앞에 행정절차 웬말이요 지도자 한마디에 그땅은 곧 도로로 변했으니…

그 고달픈 농촌 환경을 바꾼 것은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다. 그 당시의 새마을 운동은 앞에 걸리는 것이라고 없었지만 논도 들어가고 집도 뜯겨야 했기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김씨는 길을 넓히는데 자신의 논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도저히 허락 할 수 없었다. 문전옥답이 반 동강이가 날 판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사정을 해 당초 계획보다 줄였다.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새마을 지도자가 읍내에 갔다가 늦게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자신의 동네 새마을 지도자는 배짱이 두둑하기로 이름이 나 그 사람 말이 바로 동네 법이었다. 큰 체구에 입은 거침이 없어 감히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새마을 지도자는 좁아진 길을 보고 첫 마디같무슨 이따위 일을 하고 있나”“이 우매한 인간들아 평생 길 만 닦다가 마칠 기가. 한번하면은 뒷손을 안 보도록 해야지” 줄 자를 들고 완전히 일자로 그어 버렸다. 작은 논 반이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너무 손해가 많다고 입을 떼기가 무섭게“뭐라 카노…이게 네 땅이가 나라 땅이지” 이 사정 저 사정 다 봐주고 일이 제대로 되겠나 “나한테 따지지 말고 대통령에게 따져라”며 거침없이 토해냈다. 따지러 갔다가 그 위세에 눌려 “예 알겠습니다”만 연발했다. 보다 못한 동네형이 “어르신 저 동생의 땅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하자 “니 땅 더가나! 그라면 니 땅 좀 떼 줘라”두말을 못하도록 쏘아 붙였다.

김씨는“아이고 아까워라 저 피 같은 내 땅”다 자란 보리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완전히 내 땅 주고 뺨을 맞은 기분이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쪽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만 연방 물어댔다. 그때 마누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타났다. 한마디로 내 땅 뺏기고 바보 축구 같이 처량하게 앉아 있는 꼴이 보기 좋다며 몰아 세웠다. 마누라는“내 땅 주고 뭐가 무서워 절절 매느냐”고“거시기를 아예 떼라”고 다그쳤다.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지 예는 무슨 예냐고 화를 돋우었다.

이리 저리 간섭을 하고 있던 새마을 지도자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길을 넓히는데 저 집 서까래가 튀어나와 걸린다. 잘라 내라는 것이었다. 집 주인은 느닷 없이 떨어진 불벼락에 눈앞이 캄캄했다. 새마을 지도자는 옆에 있던 사람을 보고 “봐라! 톱 가져오라고”목청을 높였다. 그리고는 올라가서 서까래를 단번에 잘라버렸다. 어느 누구도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집주인은 말도 못하고 잘려나가는 서까래를 보고 가슴만 두드렸다. 새마을 지도자는 이 서까래를 그대로 놔두면 차에 받혀 집이 무너져 밤에 자다가 깔려 죽는다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돌담도 사정없이 밀어 버렸다. 막대기로 금을 그어 놓고 거기에 담을 쌓아 올렸다. 단번에 굽은 길은 곧아 졌다.

집 여주인이 못쓰게 만들었다고 한마디했다가 남자 하는 일에 안 사람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한다고 호통을 쳤다. 집 여주인도 그 호통에 주눅이 들어 나온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김씨는 동네 어르신이었던 새마을 지도자가 그때는 얄미웠지만 덕분에 길은 쉽게 넓혔다며 그 시절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점이 이해는 간다고 한다. 다소 부당했지만 전체 동민의 편리를 위해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고 땅을 내준 것도 그 시절만의 인심이자 아름다움이었다.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