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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팠던 시절…선생님이 나눠준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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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물관지킴이
댓글 0건 조회 2,860회 작성일 05-12-0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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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팠던 시절…선생님이 나눠준 도시락
‘밥’ 처럼 든든한 가르침 생각하면 배가 부릅니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렇지만 가난한 나라 살림에 학교를 짓는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골마루고 현관이고 간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공부를 했다. 그래도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눴다. 그나마 있는 교실도 오래된 기와집이다 보니 비만 오면 빗물이 새어 들었다. 물통을 갖다 놓고 떨어지는 빗물을 받았다. 갑자기 빗물이 떨어져 귀한 책이 젖는 바람에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선생님 모자라던 시골학교

그 시절 학교마다 보통 선생님 두 세 명 정도는 모자랐다. 교장선생님도 교감선생님도 공부를 가르쳐야 했다. 한 선생님이 두 반을 맡아 1반과 2반을 오고 가며 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없는 반은 교감선생님이 그 자리를 메웠지만 학교 일이 바쁘다며 교실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툭 하면 칠판에 자습이라고 커다랗게 써놓았다.하루종일 글 한자 안 배우고 떠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허다했다. 운이 나쁘면 일 년 내내 담임 선생님이 없었다. 특히 시골학교는 더 심했다. 선생님이 크게 부족한데다 시골 학교로 발령을 받으면 대부분 가지 않았다. 멋진 선생님이 한번 되어 보겠다고 큰 꿈을 가지고 온 선생님도 교문 앞에서 그냥 돌아가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버스도 다니지 않는 첩첩 산골이었기 때문이었다. 면 소재지에서도 한 시간 걷는 것은 보통이고 앞으로 봐도 산이고 뒤로 봐도 산이라 숨이 막혔다. 신작로라고 해야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만 빤하고 나머지는 풀이 무성해 곧 뱀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시골 학교에는 수업자체를 힘겨워 하는 연세가 많은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다가다가 온 젊은 선생님은 대부분 집이 시골이었다. 그러니 시골 학교에서는 늘 선생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새로 온 선생님이 인사를 오면은 다른 마음먹지 말고 같이 근무를 하자고 사정을 하는 판국이었다.

학교가도 칠판엔 ‘자습’ 일쑤…

아이들은 책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매고 학교에 가는 그 자체가 공부였다. 선생님이 있든 없든 공부를 하든 안 하든지 간에 결석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없어도 시작종이 울리면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옆 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국어 책을 펴놓고 글자 한자 쓰고 몽당연필에 침을 바르고 또 한자 쓰고 다시 연필에 침을 발라 꾹 눌러썼다. 글자가 틀리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쉬는 종이 울리면 운동장으로 뛰어 나갔다. 축구경기를 한다고 편을 갈라 주먹만한 고무공을 따라 이리저리 몰려 다녔다. 공이 작아 발에 잘 맞지도 않았지만 그 재미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10번 공을 차면 그 중에서 8번은 헛발질이었다. 공 한번 차고 나면 공보다도 검정 고무신이 더 멀리 날아갔다. 그러면 차는 공도 집어치우고 고무신을 쫓아 달려갔다. 고무신 한 켤레도 사 신기 어려운 시절에 고무신 한 짝이라도 잃어버렸다가는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부잣집 아이들도 축구공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 할 수도 없었다. 학교에 하나 정도 있는 축구공은 너무나 귀하고 귀해 신처럼 모셔 놓고 손도 대지 못했다. 일년에 한번 있는 운동회 때나 만져 볼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한다고 깡충 깡충 뛰고 있으면 심술이 발동해 연필 깎는 칼로 슬쩍 잘라버리고 달아나면 끝까지 따라와 고무줄을 물어내라고 한바탕 싸움판을 벌였다. 선생님에게 일러 바치는 날에는 그 무거운 나무 의자를 들고 꿇어앉아 한시간 내내 벌을 섰다.

천사이자 스승이던 여선생님

정영호(50)씨는 매년 5월이 되면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모두다 배고팠던 시절 시골학교에 혜성처럼 나타난 처녀 선생님,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보면 천사이자 진정한 우리의 스승이었다. 당시 살림이 너무 어려워 점심을 싸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선생님은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 뚜껑을 들고 다니며 아이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퍼 담았다. 그리고는 도시락을 싸 오지 않은 학생들을 일일이 불러내 같이 먹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들은 배가 아프다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다. 배가 고프면 잡 생각이 들어 공부가 되지 않는다며 기어이 숟가락을 들게 만들었다.

아이들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입힐 까봐 선생님이 싸 온 도시락은 항상 아이들에게 주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서 거둔 밥을 먹었다. 밥을 못 싸 온 아이들이 놀림을 받을 까봐 그 아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위의 학부모들로부터 고구마라도 들어오면 퇴근 후 삶아 두었다가 다음날 학교에 가져와 점심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꿈은 크게 가지라며 책도 한보따리 안겨주셨는데…

어려운 아이들에겐 미술시간이 정말로 괴로웠다. 물감도 사고 크레용도 사고 마분지도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리쌀 한 톨도 없는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도 버거운데 물감과 크레용을 산다는 생각도 못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미술시간만 되면 재료를 준비하지 못해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 마분지 한 장을 못사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속도 모르는 선생님은 미술 준비를 해오지 않았다고 손바닥을 때리기 일쑤였다. 미술시간만 되면 손바닥을 맞는 아이는 딱 정해져 있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형편없는 말썽꾸러기 취급을 하고 손바닥을 더 세게 때렸다. 미술이 든 날은 삽짝문 앞에 붙어 서서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보지만 돈 1원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다며 그냥 학교로 쫓아 보냈다. 그러니 미술 준비를 못해 울며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는 것보다도 친구들 보기 너무 자존심이 상해 더 울었다. 돈 1원을 못 주는 어머니도 마음이 아파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그 아이들에게는 미술 시간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러나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미술시간이 있는 하루 전날 꼭 마분지를 사오게 해 미리 거뒀다. 그러면은 보통 반에서 십여 명은 1원짜리 마분지 한 장을 사오지 못했다. 거둬들인 마분지는 반으로 나눠 다음날 미술시간에 공평하게 아이들에게 나눠 줘 그림을 그리게 했다. 크레용은 선생님이 아예 몇 통을 준비해 미술시간만 되면 내 놓았다. 한번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마분지를 거둬 반으로 나눠주는 일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뒷면에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다. 다음 미술시간에는 반드시 재활용했다.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못 갖춰 괴롭던 아이들도 모두다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예민한 나이의 아이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선생님의 깊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너희들 만 할 때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며 꿈을 키우는데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최고라고 했다. 세종대왕과 김유신•이순신•처칠•링컨 등 세계의 위인들을 매주 바꿔가며 한아름씩 안겼다. 그리고는 꼭 책의 줄거리를 물었다.

선생님은 항상 곱하기와 나누기도 중요하지만 “꿈을 가진 자 만이 성공을 할 수 있다”며 부지런히 책을 읽고 원대한 꿈을 키우라는 것이었다. 30년 후에는 지금 꿈을 크게 가진 자만이 큰 성공할 수 있다는 말도 수시로 반복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휴일 날 부산의 집에 갔다 오면서 소시지를 사 가지고 와 아이들 영양보충을 시킨다고 점심시간에 내놓았다. 아이들은 입에 넣자마자 얼굴이 똥색으로 변해버렸다. 느끼한데다 갑자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토할 것만 같았다. 모두다 도저히 못 먹겠다며 뱉어내기 바빴다. 하루 세끼 김치와 된장만 먹다가 그 기름진 것을 먹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한 아이들은 밤새 설사를 해 다음날 눈이 푹 들어간 채로 학교에 나왔다. 지금도 가끔 동창생들이 술잔을 기울이면 그때 소시지 먹고 촌놈 표를 낸 이야기하면서 배를 잡고 웃는다고 한다.

쉬는 시간에는 항상 반 아이들을 양팔에 끼고 수음지로 학교 뒷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뛰어 다닌 선생님, 돌아보면 어려웠던 시절 아이들이 아무 구김살 없이 밝게 자라도록 한 선생님의 깊은 마음에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도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선생님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