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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의 상징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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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691회 작성일 05-09-0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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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의 상징 경부고속도로

- 고속으로 현대 진입 고속 변해갔던 세태 -

총 길이 430㎞의 왕복 4차로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서울~부산 천리 길을 4시간 거리로 단축했다. 한국경제의 '검은 비단길'로 불렸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대통령을 꿈꾸던 박정희의 작품이었다.

64년 서독방문 길에서 그려졌는데, 박정희는 이때 중요한 체험을 했다. 서독의 고속도로(아우토반)와 라인강 운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는 벤츠승용차에 몸을 싣고 서독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시속 160km로 달리는 차안에서 동승한 서독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본~쾰른 구간을 왕복하며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려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피고 무언가 메모를 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각 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관한 기록을 밤늦도록 검토했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시킬 수 있는가, 2년 반 동안의 연구 끝에 박정희는 67년 5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7개월 후인 12월15일 건설계획조사단이 발족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이 올랐다. 마침내 68년 2월1일 430km 대장정의 첫 삽질이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는 당시로는 '단군이래 한민족 최대 역사'였다. 총 건설비는 430억원으로 1km에 1억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일본의 동명고속도로 건설비의 8분의1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빠른 시간 내 공사를 마쳤다.

1969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60달러에 불과했다. 부족한 재원은 일본원조차관(ECOF) 600여만 달러로 보충했다. 1968년 2월1일부터 70년 7월7일까지 연인원 900만명과 장비 165만대가 동원됐다. 현대를 비롯한 16개 건설사가 참여했고 육군 건설공병단 3개 대대도 동원됐다.

적은 돈과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 엄청난 공사가 가능했을까. 공사는 글자 그대로 불도저였다. 1공구 공사를 하며, 2공구 3공구 설계를 해나가는 식이었다.

당시 건설관계자들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독촉과 성화는 대단했다고 한다. 건설부 장관은 일주일에 한번, 도로국장은 사흘에 한번 현장에 나타났다. 말이 고속도로 공사지 사실상 총칼 없는 전쟁이었다.
그 당시 '빨리, 빨리'는 예정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당기기 위한 구호였다. 현대건설은 이미 태국에 진출해 세계은행 차관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있어 전 구간의 5분의 2를 시공했다.

현대건설이 맡은 구간은 난코스가 많아 적은 공사비로는 이익을 남기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한푼이라도 적게 적자를 보는 방법은 공사 일정 단축밖에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려면 먼저 공사를 기계화해야 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는 800만 달러 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총 중장비가 1400대 정도였는데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현대가 들여 온 중장비가 1900대였다. 또 현대건설은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 보통 시멘트보다 무려 스무 배나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조강 시멘트 생산은 단양시멘트 밖에 할 수 없었다. 생산도 문제였지만 운임도 엄청났다. 예산과 기술 부족으로 인한 공사도 어려웠지만 무모하다는 반발도 컸다."나라 살림 거덜내면서 길 닦아 놓고 놀릴 것이냐""소달구지를 고속도로에 올릴 것이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영삼 전대통령과 김대중 전대통령을 포함한 당시 야권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일부에서는 "불도저 앞에 드러눕겠다"는 극단론을 들고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개통 30여년이 지난 지금 서울~대전 구간이 왕복 8차로로 확장된 현재 경부고속도로 면적은 1100만평으로 한국도로공사가 추산한 유·무형 효과는 30여년간 8조2000억원의 차량 운행비 및 시간단축 절감비용, 1300억에 이르는 산업성장효과를 낳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수원 고속도로가 처음으로 개통된 68년 12월12일 양재동 톨게이트에서 테이프를 끊고 시주한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따라간 내빈들의 차는 거의 지프였다. 그 지프의 대다수가 대통령의 차를 따라가지 못했다.

따라갔던 차들은 도로가 너무 좋은 바람에 탈이나 대부분 정비공장 신세를 져야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국내를 휩쓸었던 지프는 얼마 안 돼 승용차로 대체된다. 지프로만 통하던 우리나라의 자동차 문화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른바 자동차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엔 국산 승용차가 성능이 떨어져 돈깨나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이런 차들은 불법 위장번호판을 붙이고 다녔는데 1971년 내무부가 일제 단속 7-8월 두 달간 무려 700여 대를 적발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을 때 텔레비전은 승용차 보닛위에 물을 넣은 유리잔을 놓고 달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박정희, 독일 아우토반에서 구상 최소의 경비로 빠른 건설이 목표

장관 하루 멀다하고 방문·독려 인원 900만명 장비 165만대 동원

경제적 성과에 쏟았던 피눈물 독재적 중앙집권의 서막이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고속도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유리잔이 흔들리지 않고 물은 넘지 않았다. 그 신기함이 텔레비전을 본 시청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서울에서 아침 먹고 고속버스를 타면 부산에서 점심을 먹는다는게 두 사람만 모이면'세상 좋아졌다'며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서울에서 대전까지 버스로 8시간 걸리던 시절이었으니 가히 놀라만한 일이었다.

고속도로의 개통은 사람들의 생활영역의 확대를 가져왔다. 장거리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고속버스 터미널, 시외 주차장, 기차역마다 대중적 주간지와 신문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잡지의 표지도 독자들의 눈을 끌기 위해 선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출판업계도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등 인쇄문화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고속버스가 등장하면서 그때까지 가장 빠른 육로 교통수단이었던 기차는 한발 뒤로 밀려났다. 넘쳐 나던 승객도 갑자기 줄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촌사람이나 타는 한물간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고속버스 여차장도 새로운 인기 직종으로 등장했다. 지금의 여객기 스튜어디스만큼 각광을 받는 직업으로 떠올랐다. 입사 시험에는 고학력의 여성들이 대거 몰렸다. 웬만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또 고속도로는 농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속도로 개통 이전만 해도 농촌 인심은 매우 순박했다. 사실 그 덕분에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부지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국가가 하는 일에 땅 안주면 천벌을 받는다"그 정도로 농촌 인심이 순박했다. 582만7000평 용지 대금으로 지급된 금액이 18억7666만3000원이었다고 한다. 평당 평균 236원에 사들인 것이다.

담배 파고다 한 갑에 40원, 쌀 한 가마에 4350원 하던 때였다. 이처럼 순박한 농촌인심이 고속도로 개통이후 도시와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설 중 77명의 희생자를 낸 경부고속도로는 한국경제의 얼굴을 바꾼 출발점 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 추풍령에 세워진 비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